겨울이면 추자도 연안에 상괭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추자도 주민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추자도에 상괭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습니다. 상괭이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상괭이편> 이 되었습니다. 이제 <상괭이편>이 매달, 추자도 바다로 나섭니다. 돌핀맨의 베롱호를 타고 상괭이를 기록합니다. 2월에도 과연 상괭이를 잘 만나고 돌아왔을까요? 예비 조사까지 합하면 벌써 4번째 조사였던, 2월 상괭이 조사의 2일차 기록입니다.
“우리 그새 많이 는 것 같아!” B5에서 B4로 향하며 5번 기록지를 기록하고 다음 지점으로 향하는 길에 상희가 이야기했다. “먼 곳의 상괭이도 제법 찾아내고, 거리감도 새로 익히고요!” 내가 맞장구쳤다.
지난 조사 후에 우리는 모슬포의 돌핀맨 사무실에서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의 장수진 대표/박사를 만났다. 우리는 장수진 박사에게 1월 첫 조사의 기록을 보여주며, 어디로 향하며 어떻게 기록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토로했다. 장수진 박사는 MARC 팀의 오랜 고래 조사 노하우와 방법을 우리에게 서슴없이 나누어주었다. 상괭이편 조사가 신뢰성을 갖기 위해서, 조금 더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도록 조사 항로와 조사 방법을 수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상괭이에 대해 알고 싶고, 잘 기록해서 알리고 싶고, 상괭이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일치했다. 상괭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MARC도 상괭이편 TF로 앞으로 함께 하기로 했다. 고래연구자가 상괭이편 TF 라니! 앞으로 만들어갈 항해에 자신감이 100배는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토로했던 어려움 중 하나는, 기록지의 ‘ 거리’를 채워 넣는 일이었다. 종일 배를 타며 목 빠지게 기다리던 상괭이가 나타나면 흥분한 채로 우린 외친다. “3시! 가까이!!” 또는 “저~ 멀리 9시, 상괭이 2마리!!” 라고. 그러나 조사 후에 리뷰 시간에 의견을 나누다 보면, ‘가까이’와 ‘저~멀리’에 대한 기억과 수치는 모두 달랐다. 누구는 50m, 누구는 20m, 누구는 100m, 누구는 300m… 장수진 박사는 매번 그 거리감을 조사자들과 함께 레이저 거리측정계로 연습한다고 했다. “상괭이는 워낙 빨라서 현장에서 직접 찍는 것(레이저를 쏘아 거리를 재는 것)은 너무 어려울 거예요. 수시로 그냥 연습해야 해요. 바다는 육지와 거리감이 전혀 달라요. 이것저것 찍어보면서 서로 거리를 이야기하고 그 감을 맞추어야 해요. 앞으로 계속 조사할 계획이라면 거리측정계 하나쯤은 구비 해 두어도 좋을 텐데, 꽤 비싸죠? 이번에는 저희 것을 빌려드릴게요.”
매번 첫째 날보다는 둘째 날이 조금 정돈된 마음으로 조사를 나서게 된다. 첫째 날은 이른 새벽에 항구에 모여 꽤 많은 짐들(촬영 장비, 2일간 배에서 먹을 음식, 조사자의 가방 등)을 배로 옮겨야 하고 연료를 구입하고 채워놓는 일도 시간이 걸린다. 물때가 잘 맞지 않아 물 수위가 너무 낮아지면, 항구에서 배로 짐과 연료통을 나르고 사람이 오르내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번 조사가 딱 그랬다. 하필 보름이 갓 지난 9물이라 조차가 큰데, 우리가 모인 6시 반은 저조시였다. 덕분에 8:00 도두사수항을 나설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낑낑 짐과 연료를 나르고 채우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생 후에 출항하니 주말까지 감기로 고생했던 보은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이번 조사가 처음인 루리는 조금 긴장 상태였으며, 기름을 사느라 이리저리 주유소 휘젓고 다녔던 상희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 또한 조사 전날 파란 총회를 마치고 각성하여 불면의 밤을 보낸 여파로 지쳐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사유로 첫째 날에는 레이저 거리계로 연습할 여력이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드디어 정돈된 마음으로 시작하는 둘째 날^^! 베롱호에 올라 항구를 나서면서부터 거리감 익히기 연습을 시작했다. 상희가 바다에 떠 있는 부표와 같은 등 지형지물을 레이저 거리계로 찍으면 서로 그 거리를 부르면서 맞춰보았다.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두 가지 놀라움의 포인트가 있었다. 하나는 바다에서 거리는 육지의 거리감에 비해 훨씬 멀다는 것! 육지라면 20m쯤으로 느껴질 거리가 바다에서는 50m로 보였다. 육지의 50m의 거리는 바다에서는 100~200m까지도 되었다. 두 번째는 서로 전혀 다른 거리 감각이 있다는 것! 같은 목표물을 보고 100m, 300m 차이는 일쑤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오답률은 더 올라갔다. 우리는 “와, 정말 연습 안 했으면 큰일 날뻔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첫 번째 목적지 B5 지점을 향하며 틈틈이 레이저 거리계를 찍고, 정답을 확인해 가며 연습했다. 20분 정도 연습을 지속하니 점점 우리의 오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B구간 08:00 - 11:15
7시 52분 B구간 시작점인 B5에 도착하여, 각자 역할에 맞게 기록지, 카메라, 핸드폰과 조사하며 틈틈이 체력을 보충해 줄 간식거리들을 주머니에 가득 채운 뒤 조사를 위해 배롱호 갑판으로 조심스레 이동했다. 나는 선수에 서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배의 오른편을 주시할 수 있도록 난간에 기대어 몸을 고정했다. B구간은 지그재그를 그리며 추자군도의 섬 사이사이를 절묘하게 스쳐 지나가는 루트이다. 항해하다 보면 바다가 섬에 둘러싸여 아늑하다가도, 섬 사이를 흐르던 물이 돌아 휘몰아치며 만들어 내는 강한 물살이 배를 흔들어대는 곳곳에 있는 변화무쌍한 코스이다. 상괭이가 이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일까… B구간은 1월 조사에서 상괭이를 많이 만났던 지역이어서 기대감을 안고 항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준은 선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게 “쭈, 저 멀리 새가 앉아 있는 곳을 주시해 봐”라고 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쳐다보자 ‘어! 있다!!’정말 작은 점으로 보이는 상괭이의 등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고 있다! “있어요!! 한 마리!” 배를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배를 둘러싸고 이곳저곳에서 상괭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희 보은 루리도 상괭이들을 확인하며 외치기 시작한다. “정면 11시 100미터 2마리!” “3시 300미터 2마리~” “10시 가까이 100미터 많아요! 3마리” 10여 분 멈추어 관찰하고 조사지에 기록을 마무리하고 다시 설정해 둔 경로를 따라 배를 이동한다.
B구간에서는 역시 기대만큼 상괭이를 많이 만났다. 그렇지만, 1월에 상괭이를 만났던 자리에서 100% 상괭이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또 1월에 만나지 못한 자리에서 불쑥 상괭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대체 상괭이들은 추자도 어디를 좋아하고, 어느 만큼이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항해가 켜켜이 쌓이면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상괭이, 너 정말 알 수 없다.’ 하며 오전 조사를 마치고 버너에 죽을 데워 먹으며 점심 겸 짧은 휴식을 취했다.
상괭이 편을 기쁘게 하는, 상괭이의 등 융기 ⓒ상괭이편
C구간 12:00 - 16:43
서둘러 점심을 챙겨 먹고 12:00 C1-C2 구간 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옷이나 몸이 젖을 정도는 아니어서 보은, 루리, 나 셋이 자신 있게 갑판으로 나갔다. 내가 선수, 루리가 망루, 보은이 좌측을 맡았다. 그런데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에 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비보다는 햇빛이 사라진 게 문제였다. 오전에 가끔이라도 나와 조금씩 몸을 데워주던 햇빛이 비구름에 가려져 완전히 사라지자, 오로지 한기만 남았다. 바람 없는 고요한 바다였지만, 배가 바다를 가르며 만들어내는 한기 가득한 바람이 우리의 옷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으악! 너무 춥다. 이런 추위는 정말 처음이다. 이래서 감독님(정준)이 ‘바다에선 옷을 잘 챙겨입어야 한다. 좋은 옷, 기능성 옷을 입어야 한다.’ 강조했던 것이다.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갑판에서 버텨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핫팩에 의지한 채 버텼다.

보길도와 소안군도 ⓒ상괭이편
이렇게 오들오들 떨다가, 한순간에 추위를 잊는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상괭이가 나타나거나, 혹은 상괭이가 나타난 것 같은 순간이다! 상괭이가 나타났다 싶으면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추위 따위는 금세 잊는다. C 구간은 추자도 동쪽으로 약 20km 먼바다를 향한다. 북쪽으로는 전라도의 보길도와 소안군도가 아련히 펼쳐져 있고, 정면으로 사수도와 여서도를 방향타 삼아 느리고 느리게 항해한다. 2일차 조사는 영등할망의 도움으로 바다가 너무나도 잔잔해서 거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정준과 상희는 마치 우주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 덕분에 300m 밖 멀리서 아주 잠시 잠깐 떠오르는 상괭이를 볼 수 있었다. C1 - C2 구간의 거의 마지막쯤, 연안에서 너무 멀어 이곳까지 상괭이가 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도록 먼 그곳에서 고요한 바다에 둥근 검은 점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진 기록이 중요했다. 이 먼 곳에서 상괭이를 보았다는 증거를 카메라에 내장된 GPS 데이터를 통해 증명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괭이는 너무 순식간에 바다로 숨어버렸다. 비에 젖을까 수건을 카메라에 덮어뒀는데, 그걸 빼고 카메라를 드는 사이에 예민한 상괭이는 물속으로 숨어 다시 매끈한 검은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긴장하며 수건을 씌웠다 벗겼다, 한 번에 수건을 벗길 수 있도록 연습하며 기다렸다. 다시 올라왔다! 1시 500m 2마리! 3시 500m 2마리! 셔터를 눌렀다!!! 찍었다! 눈곱만큼 내민 매끈한 검은 등!

눈곱만큼 내민 매끈한 검은 등 ⓒ상괭이편
아쉽게도 C구간에서 상괭이와의 만남은 단 3번이었다. 사실 멀리서 상괭이의 등이 살짝 보인 것 같은데, 딱 한 번만 더 올라와 주면 확신할 수 있는데, 한번을 더 보여주지 않아서 마음에만 남긴 상괭이도 합하면 훨씬 많다. 그러나 내가 본 게 파도의 잔상인지 상괭이인지 단 한 번의 등장으로 확신하기엔, 아직 너무 어렵다. 나마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기록이 되어버리면, 누가 우리의 기록을 믿어주겠나… 하며 상괭이를 알아보는 내 눈이 더 밝아지거나, 우리에게 조금만 더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만 커질 뿐이다.
다시 처음 상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B1-B2 구간을 조사하며 5번째 기록지를 채우고 이동하는데 상희가 이야기했다. “우리 그새 많이 는 것 같아^^!” 뿌듯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맞다. 11월 예비조사부터 벌써 4번이나 항해했다. 11월에는 아쉽게도 상괭이를 만나지 못했다. 12월에는 추자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전라도에 속한 복사초에서 상괭이와의 첫 조우를 하고 돌아왔다. 1월에는 A, B, C 3개의 루트를 처음으로 그리고 2일간 항해했다. 그 과정들에서 우린 더듬더듬 무언가 고치고, 시도해 보며 오고 있다. 정준은 항해 속도와 루트를 조정하고, 보은은 엉성했던 기록지를 기록하기 더 쉽게 만들고, 배에서 소통하는 규칙도 정했다. 조사자들의 시야 범위를 정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 공간의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상괭이가 발견되면 ‘저 멀리’가 아니라 조금 더 정확한 거리를 말하고, 제법 먼 곳의 상괭이도 찾아낸다. 다음 달에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준비물을 꼼꼼히 챙기기로 했고, 매듭법을 모두 익혀 배롱호가 정박할 때 누구든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하자고 했다. 좀 더 건강한 간식을 챙겨 모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고, 옷도 더 든든하게 챙겨입기로 했다. 나는 카메라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우리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상괭이는 얼마나 많을까? 3월 조사에 우리는 상괭이를 알아보는 눈이 조금 늘어서 더 많이 만나게 될까? 상괭이는 우리의 간절함을 알까? 다시 한번 ‘상괭이 너 정말 알 수 없다.’ 하며 ‘내가 더 노력할게.’ 하는 마음으로 2월의 기록을 마친다.
글쓴이. 신주희
[상괭이편 항해일지 더 보기]
12월 예비조사_신주희
1월 1/2편_홍상희
1월 2/2편_김보은
2월 1/2편_
2월 2/2편_신주희

망루_주희, 선수_상희, 갑판 왼편_루리, 선장_정준, 후미_보은 ⓒ상괭이편
덧, 상괭이편 인스타그램이 만들어졌어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sanggwaeng_
겨울이면 추자도 연안에 상괭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추자도 주민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추자도에 상괭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습니다. 상괭이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상괭이편> 이 되었습니다. 이제 <상괭이편>이 매달, 추자도 바다로 나섭니다. 돌핀맨의 베롱호를 타고 상괭이를 기록합니다. 2월에도 과연 상괭이를 잘 만나고 돌아왔을까요? 예비 조사까지 합하면 벌써 4번째 조사였던, 2월 상괭이 조사의 2일차 기록입니다.
“우리 그새 많이 는 것 같아!” B5에서 B4로 향하며 5번 기록지를 기록하고 다음 지점으로 향하는 길에 상희가 이야기했다. “먼 곳의 상괭이도 제법 찾아내고, 거리감도 새로 익히고요!” 내가 맞장구쳤다.
지난 조사 후에 우리는 모슬포의 돌핀맨 사무실에서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의 장수진 대표/박사를 만났다. 우리는 장수진 박사에게 1월 첫 조사의 기록을 보여주며, 어디로 향하며 어떻게 기록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토로했다. 장수진 박사는 MARC 팀의 오랜 고래 조사 노하우와 방법을 우리에게 서슴없이 나누어주었다. 상괭이편 조사가 신뢰성을 갖기 위해서, 조금 더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도록 조사 항로와 조사 방법을 수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상괭이에 대해 알고 싶고, 잘 기록해서 알리고 싶고, 상괭이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일치했다. 상괭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MARC도 상괭이편 TF로 앞으로 함께 하기로 했다. 고래연구자가 상괭이편 TF 라니! 앞으로 만들어갈 항해에 자신감이 100배는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토로했던 어려움 중 하나는, 기록지의 ‘ 거리’를 채워 넣는 일이었다. 종일 배를 타며 목 빠지게 기다리던 상괭이가 나타나면 흥분한 채로 우린 외친다. “3시! 가까이!!” 또는 “저~ 멀리 9시, 상괭이 2마리!!” 라고. 그러나 조사 후에 리뷰 시간에 의견을 나누다 보면, ‘가까이’와 ‘저~멀리’에 대한 기억과 수치는 모두 달랐다. 누구는 50m, 누구는 20m, 누구는 100m, 누구는 300m… 장수진 박사는 매번 그 거리감을 조사자들과 함께 레이저 거리측정계로 연습한다고 했다. “상괭이는 워낙 빨라서 현장에서 직접 찍는 것(레이저를 쏘아 거리를 재는 것)은 너무 어려울 거예요. 수시로 그냥 연습해야 해요. 바다는 육지와 거리감이 전혀 달라요. 이것저것 찍어보면서 서로 거리를 이야기하고 그 감을 맞추어야 해요. 앞으로 계속 조사할 계획이라면 거리측정계 하나쯤은 구비 해 두어도 좋을 텐데, 꽤 비싸죠? 이번에는 저희 것을 빌려드릴게요.”
매번 첫째 날보다는 둘째 날이 조금 정돈된 마음으로 조사를 나서게 된다. 첫째 날은 이른 새벽에 항구에 모여 꽤 많은 짐들(촬영 장비, 2일간 배에서 먹을 음식, 조사자의 가방 등)을 배로 옮겨야 하고 연료를 구입하고 채워놓는 일도 시간이 걸린다. 물때가 잘 맞지 않아 물 수위가 너무 낮아지면, 항구에서 배로 짐과 연료통을 나르고 사람이 오르내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이번 조사가 딱 그랬다. 하필 보름이 갓 지난 9물이라 조차가 큰데, 우리가 모인 6시 반은 저조시였다. 덕분에 8:00 도두사수항을 나설 때까지 한 시간 넘게 낑낑 짐과 연료를 나르고 채우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생 후에 출항하니 주말까지 감기로 고생했던 보은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이번 조사가 처음인 루리는 조금 긴장 상태였으며, 기름을 사느라 이리저리 주유소 휘젓고 다녔던 상희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 또한 조사 전날 파란 총회를 마치고 각성하여 불면의 밤을 보낸 여파로 지쳐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사유로 첫째 날에는 레이저 거리계로 연습할 여력이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드디어 정돈된 마음으로 시작하는 둘째 날^^! 베롱호에 올라 항구를 나서면서부터 거리감 익히기 연습을 시작했다. 상희가 바다에 떠 있는 부표와 같은 등 지형지물을 레이저 거리계로 찍으면 서로 그 거리를 부르면서 맞춰보았다.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두 가지 놀라움의 포인트가 있었다. 하나는 바다에서 거리는 육지의 거리감에 비해 훨씬 멀다는 것! 육지라면 20m쯤으로 느껴질 거리가 바다에서는 50m로 보였다. 육지의 50m의 거리는 바다에서는 100~200m까지도 되었다. 두 번째는 서로 전혀 다른 거리 감각이 있다는 것! 같은 목표물을 보고 100m, 300m 차이는 일쑤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오답률은 더 올라갔다. 우리는 “와, 정말 연습 안 했으면 큰일 날뻔했다.”라고 이야기하며 첫 번째 목적지 B5 지점을 향하며 틈틈이 레이저 거리계를 찍고, 정답을 확인해 가며 연습했다. 20분 정도 연습을 지속하니 점점 우리의 오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B구간 08:00 - 11:15
7시 52분 B구간 시작점인 B5에 도착하여, 각자 역할에 맞게 기록지, 카메라, 핸드폰과 조사하며 틈틈이 체력을 보충해 줄 간식거리들을 주머니에 가득 채운 뒤 조사를 위해 배롱호 갑판으로 조심스레 이동했다. 나는 선수에 서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배의 오른편을 주시할 수 있도록 난간에 기대어 몸을 고정했다. B구간은 지그재그를 그리며 추자군도의 섬 사이사이를 절묘하게 스쳐 지나가는 루트이다. 항해하다 보면 바다가 섬에 둘러싸여 아늑하다가도, 섬 사이를 흐르던 물이 돌아 휘몰아치며 만들어 내는 강한 물살이 배를 흔들어대는 곳곳에 있는 변화무쌍한 코스이다. 상괭이가 이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일까… B구간은 1월 조사에서 상괭이를 많이 만났던 지역이어서 기대감을 안고 항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준은 선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게 “쭈, 저 멀리 새가 앉아 있는 곳을 주시해 봐”라고 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쳐다보자 ‘어! 있다!!’정말 작은 점으로 보이는 상괭이의 등이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고 있다! “있어요!! 한 마리!” 배를 멈추고 잠시 기다리자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배를 둘러싸고 이곳저곳에서 상괭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희 보은 루리도 상괭이들을 확인하며 외치기 시작한다. “정면 11시 100미터 2마리!” “3시 300미터 2마리~” “10시 가까이 100미터 많아요! 3마리” 10여 분 멈추어 관찰하고 조사지에 기록을 마무리하고 다시 설정해 둔 경로를 따라 배를 이동한다.
B구간에서는 역시 기대만큼 상괭이를 많이 만났다. 그렇지만, 1월에 상괭이를 만났던 자리에서 100% 상괭이를 만난 것은 아니었다. 또 1월에 만나지 못한 자리에서 불쑥 상괭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대체 상괭이들은 추자도 어디를 좋아하고, 어느 만큼이나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항해가 켜켜이 쌓이면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상괭이, 너 정말 알 수 없다.’ 하며 오전 조사를 마치고 버너에 죽을 데워 먹으며 점심 겸 짧은 휴식을 취했다.
C구간 12:00 - 16:43
서둘러 점심을 챙겨 먹고 12:00 C1-C2 구간 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옷이나 몸이 젖을 정도는 아니어서 보은, 루리, 나 셋이 자신 있게 갑판으로 나갔다. 내가 선수, 루리가 망루, 보은이 좌측을 맡았다. 그런데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에 한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비보다는 햇빛이 사라진 게 문제였다. 오전에 가끔이라도 나와 조금씩 몸을 데워주던 햇빛이 비구름에 가려져 완전히 사라지자, 오로지 한기만 남았다. 바람 없는 고요한 바다였지만, 배가 바다를 가르며 만들어내는 한기 가득한 바람이 우리의 옷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으악! 너무 춥다. 이런 추위는 정말 처음이다. 이래서 감독님(정준)이 ‘바다에선 옷을 잘 챙겨입어야 한다. 좋은 옷, 기능성 옷을 입어야 한다.’ 강조했던 것이다.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갑판에서 버텨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기 시작했지만, 핫팩에 의지한 채 버텼다.
보길도와 소안군도 ⓒ상괭이편
이렇게 오들오들 떨다가, 한순간에 추위를 잊는 순간들이 있었다. 바로 상괭이가 나타나거나, 혹은 상괭이가 나타난 것 같은 순간이다! 상괭이가 나타났다 싶으면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추위 따위는 금세 잊는다. C 구간은 추자도 동쪽으로 약 20km 먼바다를 향한다. 북쪽으로는 전라도의 보길도와 소안군도가 아련히 펼쳐져 있고, 정면으로 사수도와 여서도를 방향타 삼아 느리고 느리게 항해한다. 2일차 조사는 영등할망의 도움으로 바다가 너무나도 잔잔해서 거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정준과 상희는 마치 우주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 덕분에 300m 밖 멀리서 아주 잠시 잠깐 떠오르는 상괭이를 볼 수 있었다. C1 - C2 구간의 거의 마지막쯤, 연안에서 너무 멀어 이곳까지 상괭이가 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도록 먼 그곳에서 고요한 바다에 둥근 검은 점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진 기록이 중요했다. 이 먼 곳에서 상괭이를 보았다는 증거를 카메라에 내장된 GPS 데이터를 통해 증명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상괭이는 너무 순식간에 바다로 숨어버렸다. 비에 젖을까 수건을 카메라에 덮어뒀는데, 그걸 빼고 카메라를 드는 사이에 예민한 상괭이는 물속으로 숨어 다시 매끈한 검은 등을 보여주지 않았다. 긴장하며 수건을 씌웠다 벗겼다, 한 번에 수건을 벗길 수 있도록 연습하며 기다렸다. 다시 올라왔다! 1시 500m 2마리! 3시 500m 2마리! 셔터를 눌렀다!!! 찍었다! 눈곱만큼 내민 매끈한 검은 등!
눈곱만큼 내민 매끈한 검은 등 ⓒ상괭이편
아쉽게도 C구간에서 상괭이와의 만남은 단 3번이었다. 사실 멀리서 상괭이의 등이 살짝 보인 것 같은데, 딱 한 번만 더 올라와 주면 확신할 수 있는데, 한번을 더 보여주지 않아서 마음에만 남긴 상괭이도 합하면 훨씬 많다. 그러나 내가 본 게 파도의 잔상인지 상괭이인지 단 한 번의 등장으로 확신하기엔, 아직 너무 어렵다. 나마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기록이 되어버리면, 누가 우리의 기록을 믿어주겠나… 하며 상괭이를 알아보는 내 눈이 더 밝아지거나, 우리에게 조금만 더 나타나 주길 바라는 마음만 커질 뿐이다.
다시 처음 상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B1-B2 구간을 조사하며 5번째 기록지를 채우고 이동하는데 상희가 이야기했다. “우리 그새 많이 는 것 같아^^!” 뿌듯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맞다. 11월 예비조사부터 벌써 4번이나 항해했다. 11월에는 아쉽게도 상괭이를 만나지 못했다. 12월에는 추자도에서 북쪽으로 멀리, 전라도에 속한 복사초에서 상괭이와의 첫 조우를 하고 돌아왔다. 1월에는 A, B, C 3개의 루트를 처음으로 그리고 2일간 항해했다. 그 과정들에서 우린 더듬더듬 무언가 고치고, 시도해 보며 오고 있다. 정준은 항해 속도와 루트를 조정하고, 보은은 엉성했던 기록지를 기록하기 더 쉽게 만들고, 배에서 소통하는 규칙도 정했다. 조사자들의 시야 범위를 정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바다 공간의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상괭이가 발견되면 ‘저 멀리’가 아니라 조금 더 정확한 거리를 말하고, 제법 먼 곳의 상괭이도 찾아낸다. 다음 달에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준비물을 꼼꼼히 챙기기로 했고, 매듭법을 모두 익혀 배롱호가 정박할 때 누구든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하자고 했다. 좀 더 건강한 간식을 챙겨 모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고, 옷도 더 든든하게 챙겨입기로 했다. 나는 카메라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우리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상괭이는 얼마나 많을까? 3월 조사에 우리는 상괭이를 알아보는 눈이 조금 늘어서 더 많이 만나게 될까? 상괭이는 우리의 간절함을 알까? 다시 한번 ‘상괭이 너 정말 알 수 없다.’ 하며 ‘내가 더 노력할게.’ 하는 마음으로 2월의 기록을 마친다.
글쓴이. 신주희
[상괭이편 항해일지 더 보기]
12월 예비조사_신주희
1월 1/2편_홍상희
1월 2/2편_김보은
2월 1/2편_
2월 2/2편_신주희
망루_주희, 선수_상희, 갑판 왼편_루리, 선장_정준, 후미_보은 ⓒ상괭이편
덧, 상괭이편 인스타그램이 만들어졌어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sanggwaeng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