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학] [상괭이편] 4월 상괭이조사 항해일지(1 / 2)

대방어
2025-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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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첫째 날.


“추자로 향하는 배에서 일출을 보게 될꺼야.” 도두항으로 향하기 전, 보은은 내게 말했었다. 하지만, 4월의 항해는 땅 위로 갓 올라온 해의 배웅을 받으며 시작했다. 상괭이편은 매달 같은 곳으로 향하며 상괭이와 함께 바다의 시간 속을 함께 흘러가고 있구나, 선미에 앉아 여린 햇살 아래 숨을 고르고 있는 한라산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11월부터, 벌써 6달째 이어지고 있는 상괭이편은 꽤 합이 잘 맞아 정말 한 팀 같았다. 상희는 항해 경로, 안전 수칙 등을 설명했고, 이번 항해의 부선장을 맡은 보은은 우리에게 포지션을 정해줬다. 이번 항해가 처음인 지정과 나는 각각 1~4시 방향과 8시~11시 방향을 관찰하는 A와 C를 맡았고, 보은은 정면을 넓게 관찰하는 B가 되기로 했다. 관찰자는 50분이 지나면 자리를 바꾸는데, 마지막 D의 역할은 다음 관찰을 위한 휴식이었다. 2~3일의 항해동안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 규칙을 정하기까지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했다.  


부선장 보은이 조사계획을 설명 중 ⓒ상괭이편


8시 10분, A1에 도착했지만 파도의 일렁임이 내 몸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사색이 된 나에게 정준은 눈과 귀, 몸에서 받아들이는 감각 정보가 서로 어긋나 생기는 것이라며  멀미의 이유를 설명했고, 선실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라고 권했다. 나는 첫 관찰부터 D가 되어 선실에 누워있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 정준의 처방은 효과가 있었다. 50분 후, 포지션을 바꿀 즈음엔 멀미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A가 된 나는 배의 앞머리에 앉아 12시, 1시, 2시, 3시… 50m, 100m, 200m… 상괭이가 모습을 드러낼 순간을 위해 수면 위에 가상의 선을 그어 보았다. 물론, 거리 판단의 기준이 부족한, 끝없는 바다 위에서 내가 그은 선이 정확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리고 상괭이편 멤버들의 조언대로 시야를 넓게 유지한 채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다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지그재그 선을 그리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무엇인가를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문득, 대학시절 천체동아리 친구들과 돗자리에 누워, 언제 떨어질지 모를, 어쩌면 끝내 떨어지지 않을 별똥별을 기다리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기 위해 수도 없이 주문처럼 외우며 기다렸던 밤의 시간들. 물론 인간종 중에도 다소 느린 편인 나는 단 한 번도 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외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다림 자체가 소원이니 외칠 수 있을 것 같다. 상괭이! 

물론 상괭이를 본다면 ‘상괭이!’가 아니라 ‘3시 방향, 둘!’이라고 외쳐야 하겠지만…… 뭐가 되었든 상괭이가 나타나 꼭 외칠 수 있기를 바라며 바다 위를 계속 바라보았다. 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에서 파란색이 차지하는 비율이 조금씩 많아졌고, 바다도 하늘을 닮아 회색에서 파랑이 되어갔다.


8~11시 C 자리에 있는 소은  ⓒ상괭이편


“위치 교대!”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정준이 소리쳤다. 이번에는 내가 망루에 오를 차례이다. 이 망루는 정준과 상희가 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배를 개조해 만든 것이었다. 이곳에서 바라본 바다는 아래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넓게 펼쳐져 보였다. 그래서일까, 물 밖으로 솟아올랐다가 이내 사라지는 수많은 파도들 중, 어느 하나쯤은 상괭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절반쯤은 가신 듯했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게 느껴졌고, 나를 향해 쏟아지듯 들이치는 바람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마치, 수면 위에서 우아하게 방향을 바꾸는 추자도의 슴새가 된 듯 했다. 정준은 망루가 더 잘 볼 수 있는 자리인만큼, 그곳에 앉은 사람이 더 잘 관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9시 50분, A2에 도착하자 정준은 배의 머리를 북동쪽으로 돌렸다. 해를 마주보게 되니 마치 새벽에서 정오로 몇 시간을 한꺼번에 건너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의 색, 질감, 바람, 온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수면 위는 마치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진 듯 반짝이며 빛났다.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이 서서히 흐려지는 것 같았다. A3에서 A4로 향하는 길에는 섬조차 보이지 않았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방향이 수평선으로 끝이 났다. 마치 바다라고 불리는, 커다랗고 평평한 둥근 세상에 베롱호만이 홀로 떠 있는 것 같았다. 간혹 다른 차원의 세상이 스치듯 어선이 수평선 끝에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곤 했다. 점심 무렵부터 몰려온 안개는 이 낯설고도 묘한 감각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상괭이편이 관찰하는 것은 상괭이만이 아니었다. 보은과 상희는 마주칠 때마다 암호같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bc?”
“1이지?”
“감독님, 0으로 볼 수도 있어?”
“m이야”
“백파가 생겼어. 3이야.”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이 말들이 하늘과 바다의 상태를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의 하늘은 맑고 구름(bc)이었다가 안개(m)가 짙어졌고, 바다는 어느 순간 고기비닐 같은 잔잔한 파도(1)를 일었다가 작은 파도들이 거품을 만들며 해면 여기저기에 백파가 이는 상태(3)가 되기도 했다.

 

오후 3시, 베롱호는 여전히 바다 위에 있고, 나는 또다시 망루에 앉아 있었다. 왼쪽, 오른쪽, 지그재그로 시선을 옮기며 상괭이를 기다렸다. 정면에 보이는 직구도가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상괭이를 보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달래주는 것만 같았다. 

3시 51분, A5 도착. 오늘의 항해가 끝이 났다.



한라산과 슴새 ⓒ상괭이편




4월 25일. 둘째 날.


2일차의 항해는 10시 9분에 시작되었다. 정준은 거침없이 B5를 향해 배를 몰았고, 우리는 ‘거리감 익히기 훈련’으로 분주했다. 거리 측정기를 든 상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거리를 재려는 듯 끊임없이 외쳤다. 

“빨간 등대!”, “우측 섬!”, “초록색 구조물”, “좌측 선박!”. 

그때마다 우리는 “200미터!”, “300미터!”, “50미터!” 빠르게 거리값을 추측해 외쳤다. 하지만 정답에 점점 가까워지는 듯 하다가도, 엉뚱한 수치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10시 38분. B5에 도착했다. 짙은 검푸른 빛의 바다와 잔뜩 구름이 낀 하늘. 하지만 그 구름 사이로 비치 듯 보이는 파란 하늘에 마음이 설렜다. 전날에는 낯선 항로 탓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싶은 순간이 많았기에 오늘은 틈틈히 지도 앱을 켜고 위치를 캡쳐해 두었다. 덕분에 지금 눈앞에 보이는 섬들의 이름이 푸랭이(청도)와 수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11시, 베롱호는 푸랭이와 수덕도 사이에 떠 있었다. 2일차의 항해는 섬 사이를 오가며 진행되었기에 섬의 이름을 익히고 그 생김새를 눈에 담는 재미가 있었다.


 

푸랭이(청도)와 수덕도 ⓒ상괭이편


B4에서 B3로 향해 가던 중, 물이 빠지는 방향과 반대로 이동한 탓에 배의 속도는 느려지고 너울이 심해졌다. 하지만 곧, 바다의 돌기가 부드러워지고 수면이 점점 평평해졌다. 의심할 만한 것들이 사라지자 상괭이를 놓치지 않을 자신감이 높아졌다. 하늘 위 구름들은 선을 그리듯 해 아래로 모여 방사형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그 사이로 스며든 햇빛이 연기가 피어오르듯 퍼졌고, 마치 하늘이 염력을 뿜어내는 듯 했다. 나는 그 염력이 베롱호를 향해, 우리에게 상괭이를 보여주기를 조용히 바랐다.


12시 30분, 휴식을 취하는 D 차례가 되었지만, 구름이 걷히며 바다가 경쾌하게 살아나는 듯 했다. 선실 안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선미로 나가 청록빛으로 변한 바다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12시 50분쯤, 흑검도와 꽤 가까이 지나쳤고, 거친 돌의 결, 연두색 지표식물, 그리고 틈새마다 무심한 듯 자라난 작은 나무의 질감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다.


 흑검도 ⓒ상괭이편


1시 6분, B2를 출발하여 1시 44분에 B1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은 뒤, 2시 33분 C1에서 다시 항해를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C구간에서는 바다새를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보은은, 수면 가까이에서 날갯짓을 하며 제동을 거는 새는 갈매기, 날개를 쭉 펼치고 우아하게 하강하는 새가 슴새라고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가던 세 마리의 새는 분명 슴새였다. 


슴새 ⓒ상괭이편


3시 30분 쯤, 파도와 배의 방향이 같아졌다. ‘붕~’하고 베롱호가 높은 파도 위에 올라앉았다가 ‘쭉~’하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붕~ 쭉~ 붕~ 쭉~’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듯했다. 하지만 3시 54분, C2에 도착한 뒤 C3를 향해 방향을 바꾸자 베롱호는 이제 파도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항해해야 했다. 2초마다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배, “쿵!"하고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진동처럼 퍼졌다. 선미로 자리를 옮겨 관찰을 계속 이어가던 상희와 지정은 온 몸에 바닷물을 뒤집어썼다. 좀처럼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해가 기울어가는 6시 25분이 되어서야 겨우 C3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는 아직 추자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쇠머리여 앞바다, 거센 물살 위로 슴새 무리가 낮게 맴돌고 있었다. 적어도 몇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새와 상괭이와 어부는 한 곳에 있다.’ 제주에 다녀온 보은이 언젠가 내게 해줬던 말이었다. 혹시 저곳에 상괭이가 있지 않을까. 그 기대를 품고 슴새 무리가 나는 바다의 표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괭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추자도로 해가 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 노을을 따라 추자도로 돌아왔다.  


 슴새 ⓒ상괭이편


항해가 끝난 후, 상희에게 물었다. “베롱호는 무슨 뜻이에요?” “제주어로,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이에요. 끝없는 바다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게 드넓은 우주에서 별을 찾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베롱호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별똥별을 기다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나도 상괭이를 기다렸구나 싶었다. 나의 항해는 단 사흘이었지만 그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보냈을까. 그 생각에, 새삼 경외심이 들었다. 4월의 항해에서 상괭이는 만나지 못했지만, 상괭이편과 함께했던 항해는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했다.


글쓴이 김소은


4월 상괭이편 조사팀(지정, 보은, 상희, 정준, 소은) ⓒ상괭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