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달리 바다
-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립니다. -
채지애 | 삼달리 해녀

물질 ©채지애
나의 바다는 성산읍 삼달리에 속해있는 바다다. 예전에 고기와 해산물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주어동(住漁洞)이라고 불렸던 시기도 있었다. 어릴 적 해녀인 친정어머니 물 마중을 많이 나갔기에 삼달리바다는 늘 익숙한 곳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물 빠진 여에 앉아 성게도 잡고 보말도 잡고 물놀이도 하고 놀이터 같은 곳이도 했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바다였기 때문인지, 어느 날 나는 해녀가 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해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물질을 시작한 이유는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어린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고, 아이들을 데리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해녀라는 직업에 마음이 끌렸다.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지만, 삼달리 바다는 오갈 곳 없던 나를 받아 주었다.

삼달리 해녀탈의장에서 해녀 삼촌들과 아이들 ©채지애
아이들이 아파 물질을 하다 일찍 나와야 하는 날에는 미처 채우지 못한 테왁망사리에 삼촌들 자신이 잡은 것을 넣어 주시기도 하셨다. 불턱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날에는 함께 아이들을 돌봐 주시기도 했다. 어린이날 같은 때, 바다에 들어야 하는 날이면 갯바위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미안함에 울었다. 눈이 퉁퉁 불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삼촌은 그런 나를 보곤 아직 마음이 너무 여려 어찌 바당에 들겠냐며 자식이 아퍼도 물에 들어야하는게 해녀라 살당보면 살아진다 말씀하셨다. 당시는 그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요즘 해녀는 선택적 직업이지만,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는 제주 여인이라면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안에서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리셨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갯바위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채지애

아이들과 ©채지애
작업 중에 동료가 사고가 나도 바다를 무서워하면 안된다. 바다가 무서워지는 순간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나 또한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삼촌의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며칠 트라우마로 악몽을 꾸었지만, 아이들과의 생계를 위해 다시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풍요로운 삶을 주는 곳이지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함께하는 곳이란 것을 몸소 깨달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로지 맨몸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 바다가 예쁘다는 환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욕심을 덜어 내다보면 바다는 잘하고 있다는 듯, 간혹 얼굴만 한 전복을 내어주기도 했다. 물 멀미가 심해 더는 작업을 못 하고 나가야겠다 싶을 때 홍해삼을 내어주며 밀당을 하기도 했고, 어디다 말 못할 속상할 일이 있는 날, 물질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났는지 잊어버리곤 했다.


얼굴만한 전복과 홍해삼 ©채지애

임신 중 물질가는 채지애 해녀 ©홍예
울고 싶을 때는 바닷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니 마음껏 쏟아냈다. 그렇게 바다에게 위로 받고, 교훈을 얻고, 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바다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고마운 연을 이어주기도 했다.
삼촌 말대로, 살당보니 살아지더라.
지금은 나이가 드신 해녀 삼촌 대부분이 은퇴하셨지만, 내가 바다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겹쳐 보셨던 것 같다.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닌 내 가족을 위한 마음으로, 여인의 몸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고된 바닷일을 견뎌 오셨을 것이다.
삼촌들이 고령으로 하나둘 은퇴하시면서 풍요로웠던 바다이야기, 물 속에서의 삶, 이 모든 게 바다의 황폐함과 동시에 전설처럼 이야기로만 남으며 사라질까 두렵다. 그리고 해녀라는 직업이 결코 가볍게 소비되거나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지금 이 바다를 살아낸 할머니, 어머니 세대가 곁에 계시는 동안에는 그들의 삶과 바다를 존중해주시면 좋겠다.

잠수하는 채지애 해녀 ©김원국
후담.
올초 갑작스런 암 진담을 받고 수술을 받으면서 잠시 쉬어가고 있지만 수술 전날, 물벗 중 한 분이 해주신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지애야 수술 받는 게 물질보다 덜 힘들어 그러니 잘 견뎌줘”라고(같은 아픔을 겪은 물벗). 8시간의 수술을 받고 깨어나면서 타들어갈듯한 목마름과 어지러움 울렁거림과 졸음이 쏟아져 밀려왔다. 그럼에도 바로 잠을 자선 안되고 물을 다음 날까지 마셔도 안되어서 너무 힘들었는데, 물질보다 안 힘들어라는 농담처럼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주문처럼 중얼중얼 내뱉었더니 신기하게도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미역 작업 철에 물 한모금 마실 여유없이 미역 조물어오고 바깥으로 밀어내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와 나르고, 널고 뒤집고 또 널고 밤새 포장하던 일을 생각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물멀미와 싸워야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항암약의 고통을 겪고 있다.
늘 목숨을 걸고 들었던 바다에서 삶이 있다.
그리고 이제 뭍(육지)에서도 삶을 견뎌낼 힘을 바다가 준 듯하다.

삶을 헤쳐가듯 파도를 뚫고 나가는 채지애 해녀 ©홍예
삼달리 바다
-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립니다. -
채지애 | 삼달리 해녀
물질 ©채지애
나의 바다는 성산읍 삼달리에 속해있는 바다다. 예전에 고기와 해산물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주어동(住漁洞)이라고 불렸던 시기도 있었다. 어릴 적 해녀인 친정어머니 물 마중을 많이 나갔기에 삼달리바다는 늘 익숙한 곳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물 빠진 여에 앉아 성게도 잡고 보말도 잡고 물놀이도 하고 놀이터 같은 곳이도 했다. 어릴 적부터 익숙했던 바다였기 때문인지, 어느 날 나는 해녀가 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사실 해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 물질을 시작한 이유는 아이들을 굶기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어린 두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고, 아이들을 데리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해녀라는 직업에 마음이 끌렸다. 어머니의 반대도 있었지만, 삼달리 바다는 오갈 곳 없던 나를 받아 주었다.
삼달리 해녀탈의장에서 해녀 삼촌들과 아이들 ©채지애
아이들이 아파 물질을 하다 일찍 나와야 하는 날에는 미처 채우지 못한 테왁망사리에 삼촌들 자신이 잡은 것을 넣어 주시기도 하셨다. 불턱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날에는 함께 아이들을 돌봐 주시기도 했다. 어린이날 같은 때, 바다에 들어야 하는 날이면 갯바위에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보며 미안함에 울었다. 눈이 퉁퉁 불고 벌겋게 달아올랐다. 삼촌은 그런 나를 보곤 아직 마음이 너무 여려 어찌 바당에 들겠냐며 자식이 아퍼도 물에 들어야하는게 해녀라 살당보면 살아진다 말씀하셨다. 당시는 그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말씀이었다. 요즘 해녀는 선택적 직업이지만,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는 제주 여인이라면 숙명처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안에서 얼마만큼의 눈물을 흘리셨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갯바위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채지애
아이들과 ©채지애
작업 중에 동료가 사고가 나도 바다를 무서워하면 안된다. 바다가 무서워지는 순간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나 또한 시작한지 얼마 되지않아 삼촌의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며칠 트라우마로 악몽을 꾸었지만, 아이들과의 생계를 위해 다시 바다로 향했다. 바다는 풍요로운 삶을 주는 곳이지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이 함께하는 곳이란 것을 몸소 깨달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오로지 맨몸으로 나아가야 하는 상황. 바다가 예쁘다는 환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그래도 욕심을 덜어 내다보면 바다는 잘하고 있다는 듯, 간혹 얼굴만 한 전복을 내어주기도 했다. 물 멀미가 심해 더는 작업을 못 하고 나가야겠다 싶을 때 홍해삼을 내어주며 밀당을 하기도 했고, 어디다 말 못할 속상할 일이 있는 날, 물질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났는지 잊어버리곤 했다.
얼굴만한 전복과 홍해삼 ©채지애
임신 중 물질가는 채지애 해녀 ©홍예
울고 싶을 때는 바닷물인지 눈물인지 모르니 마음껏 쏟아냈다. 그렇게 바다에게 위로 받고, 교훈을 얻고, 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바다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고마운 연을 이어주기도 했다.
삼촌 말대로, 살당보니 살아지더라.
지금은 나이가 드신 해녀 삼촌 대부분이 은퇴하셨지만, 내가 바다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겹쳐 보셨던 것 같다. 나를 위한 욕심이 아닌 내 가족을 위한 마음으로, 여인의 몸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고된 바닷일을 견뎌 오셨을 것이다.
삼촌들이 고령으로 하나둘 은퇴하시면서 풍요로웠던 바다이야기, 물 속에서의 삶, 이 모든 게 바다의 황폐함과 동시에 전설처럼 이야기로만 남으며 사라질까 두렵다. 그리고 해녀라는 직업이 결코 가볍게 소비되거나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지금 이 바다를 살아낸 할머니, 어머니 세대가 곁에 계시는 동안에는 그들의 삶과 바다를 존중해주시면 좋겠다.
잠수하는 채지애 해녀 ©김원국
후담.
올초 갑작스런 암 진담을 받고 수술을 받으면서 잠시 쉬어가고 있지만 수술 전날, 물벗 중 한 분이 해주신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지애야 수술 받는 게 물질보다 덜 힘들어 그러니 잘 견뎌줘”라고(같은 아픔을 겪은 물벗). 8시간의 수술을 받고 깨어나면서 타들어갈듯한 목마름과 어지러움 울렁거림과 졸음이 쏟아져 밀려왔다. 그럼에도 바로 잠을 자선 안되고 물을 다음 날까지 마셔도 안되어서 너무 힘들었는데, 물질보다 안 힘들어라는 농담처럼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주문처럼 중얼중얼 내뱉었더니 신기하게도 몸이 한결 편안해졌다. 미역 작업 철에 물 한모금 마실 여유없이 미역 조물어오고 바깥으로 밀어내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와 나르고, 널고 뒤집고 또 널고 밤새 포장하던 일을 생각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물멀미와 싸워야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항암약의 고통을 겪고 있다.
늘 목숨을 걸고 들었던 바다에서 삶이 있다.
그리고 이제 뭍(육지)에서도 삶을 견뎌낼 힘을 바다가 준 듯하다.
삶을 헤쳐가듯 파도를 뚫고 나가는 채지애 해녀 ©홍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