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소꿉놀이가 지금의 직업으로
고제량 님 인터뷰
홍시의 말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어릴 때부터 유독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 소꿉놀이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고, 자연에 대한 미안함으로 ‘생태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람, 바로 ‘제주생태관광협회’의 고제량 대표입니다. 자연을 보존하면서도 더 나은 지역 주민의 삶에 기여하는 방식의 관광에 몰두하는 고제량(이하 제량) 님을 지난 7월 초에 제주 함덕 바다 앞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홍시 : 고제량 님, 제주에서 나고 자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제량 :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재미있었던 것은 소꿉장난이죠.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 돌조각이나 항아리 깨진 조각, 그리고 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상도 차려 내고 꽃 장식도 하면서 조그마한 나의 공간을 꾸리며 살았어요. 그 소꿉장난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현재 주소로는 이도2동인데, 제가 1966년생이니까 거기는 아주 산골이었어요. 주변에 인가도 없었고요.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 산골에 자그마한 땅을 사 가지고 들어갔고, 저는 거기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이 과수원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곳이 얼마나 산골이냐 하면, 제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전기와 수도가 들어왔어요. 전화는 제가 대학생 때 들어왔고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 뒤의 과수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가 고제량님 ⓒ고제량
홍시 : 지금은 번화가인 이도2동이 그때는 그렇게 시골이었다니 놀랍네요.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도 주변에 보이는 온갖 것들이 친구가 되었겠어요.
제량 : 유일한 친구였던 동생, 그리고 한참 떨어진 동네에 있는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놀았죠. 그런데 그 당시 놀았던 경험이 지금 제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환경교육을 잘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데, 사실은 소꿉놀이가 가장 잘 맞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꿉놀이는 식물을 잘 관찰해야 하거든요. 이게 사과를 닮았는지, 배를 닮았는지, 아니면 그릇으로 쓸 수 있는지, 식탁보로 쓸 수 있는지를 다 살펴야 해요. 식물을 잘 관찰하고 만져 보니 촉감도 알게 되고, 흙을 만지면서 흙으로 밥도 짓고 열매와 함께 상을 차리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것들을 상세히 살폈던 기억이 있어요.
홍시 : 제량 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네요. 이제 제량 님께서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그리고 이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량 : ‘생태 관광’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연을 보존하면서 현명하게 이용하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제주생태관광협회’의 대표를 맡아 생태 관광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그 수익으로 먹고살고 있지요.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자연에 대한 미안함에서 출발했어요. 여섯 살 무렵의 일인데요. 어느 날 흙무더기 위에서 놀고 있는데 구멍이 보이는 거예요. 무슨 구멍인가 궁금해서 꽃삽으로 구멍을 계속 팠죠. 파고 또 파고 계속 팠어요. 그런데 그걸 본 열두 살 많은 우리 오빠가 “너 그렇게 구멍 파버리면 그 속에 있는 거 죽어.” 이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뭔가가 죽는다는 생각도 못 했고 그 구멍 속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전혀 생각 못 했죠. 오빠의 말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파다 보니 그 구멍으로 계속 흙이 쏟아지고 있었거든요. 무언가를 내가 죽였다 생각하니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날 정도로 큰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인간 말고 뭔가 다른 죽는 것이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미안함, 부채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홍시 : 인간 이외의 존재, 다른 생명에 대한 인식이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군요.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생태 관광을 직업으로 삼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한데요?
제량 :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어요. 전공 공부보다는 시 쓰는 동아리에 들어가 문과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요.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80년대 중반에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들 쫓아다니느라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죠. 그래도 대기기사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서 졸업 후에 첫 직장으로 H호텔의 대기기사 전문가로 취업했어요. 여기서 일하며 우여곡절이 되게 많았고 억울한 일도 많았어요. 그냥 다 그만두고 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을 지키는 방법이 뭐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91년 무렵 ‘푸른 이어도의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환경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하다 보니 제주는 ‘관광’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 그 관광이 제주의 환경을 훼손시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환경을 훼손시키는 관광’ 대신 ‘환경을 보존하는 관광’이 필요하다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생태 관광’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1992년 무렵 H호텔 근무 당시 교육 중에 ⓒ고제량
홍시 : ‘생태관광’은 제량님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제량 : 대기기사로 3년을 일했는데 그때는 그냥 돈 버는 직업이었어요. 그것이 특별히 기쁘거나 내가 뭔가 세상에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거든요. 환경을 다루는 대기기사라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그저 돈 버는 직업인으로 존재했다면, 생태 관광 분야의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생태 관광은 나의 철학이자 삶인 거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삶이 일이고 일이 삶이고 그렇게 경계가 없어지더라고요. 시간의 경계도 없고, 제주시건 육지건 장소의 경계도 없이 그저 관련된 일은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생각하며 다니고 있어요. 근데 이제 나이가 드니 몸이 저절로 느려지고 마음도 느긋해지더라고요. 지금은 천천히 내 시간에 맞게 하려 노력하지만, 예전에는 치열하게 일한 것 같아요.


2024년 물장오리습지에서(왼), 2025년 동백동산에서 생태해설하는 모습(오) ⓒ고제량
홍시 : 내 일의 주인,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계신 것 같네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잊히지 않는 억울한 일이 있었나요?
제량 : 말도 안 되게 억울한 일 있었죠. 대기기사로 들어간 호텔에서 입사하자마자 저를 ‘미스 고’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리고 부장 사무실 앞에 타자기 있는 테이블을 주면서 거기서 일하래요. 저는 원래 전문직 대기환경기사로 입사한 건데 사무직 비서의 일을 시키더라고요. 그리고는 “커피 타 와라”, “회의 시간에 복사해 와라” 하는 거예요. 저는 “저 커피 안 타요.” “복사 안 해요. 저도 회의 참석할 거예요.” 그랬어요. 또 작업복을 맞춰 주는데 남자들은 다 바지이고 저만 여자라고 치마로 준다는 거예요. “저는 대기를 점검해야 하는 사람이니 치마는 필요 없습니다. 바지로 주세요.” 했지요. 주변 사람들이 다 황당해하면서 ‘쟤 뭐지?’ 하더라고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견딜 만했어요. 환경법에 보일러를 운전하는 업장은 집진기를 설치하여 대기 중으로 나오는 연기를 포집해 매달 검사해야 하거든요. 기준치 이상으로 나오면 벌금을 내고 조치를 취해야 하고요. 그런데 제가 대기기사니까 검사할 때 동행해서 보거든요. 제가 봤을 때 집진기에서 포집을 하면 하얀 필터가 새까매지고 분명 문제가 있는데도 업체에서는 기준치 이하라는 결과를 보내오는 거예요. 어떤 때는 집진기 코드가 뽑혀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문제가 몇 달 동안 계속되었어요. 급기야 제가 그 업체를 찾아갔어요. 제대로 검사하는 거 맞냐, 사실대로 결과 보내달라 했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하는 말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그분이 양심적인 분이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기준치 이상’이라는 결과를 보내왔고 제가 일하던 호텔은 벌금 500만 원을 내게 되었죠. 저는 이제라도 고칠 테니 다행이다 싶어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는 좋은 마음으로 대학 과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너무너무 억울한 말을 들은 거예요. 과 선배 언니가 제 얘기를 이미 들었는지 “너 그렇게 해서 이 사회 어떻게 살래” 그러는 거예요. 믿었던 선배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고 너무 억울했어요. 커피 사건, 복사 사건, 치마 사건에 이어 대기오염 기준치 문제까지 소문 다 났다면서 고제량이 지금 반항하고 있고 맹랑하다는 거예요. 내가 커피 타는 것과 복사하는 것을 거부해야 내 여자 후배들이 커피 안 타고 복사 안 하지 않겠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 회사의 문화가 그랬다는 건 이해하지만, 선배의 그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억울하더라고요.

2026년 3월 제주도 습지학교 교사들에게 강의 중 ⓒ고제량
홍시 : 제주도는 특히 개발과 보존의 문제로 첨예한 갈등이 많은 곳이죠. 최근에 겪은 사례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량 :람사르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회는 법정 위원회예요. 저는 거기 전문위원이었고요. 2020년 선흘 지역에 동물테마파크가 들어오는 문제가 생기자 지역 주민들이 ‘동물테마파크 반대 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문제점을 알리며 반대 입장의 보도자료까지 다 나간 상태인데, 어느 날 갑자기 위원장이 확 돌아서며 찬성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주도에 관광 수입을 올리는 거니 찬성하자고요. 이런 위원장을 그냥 둘 수 없었죠. 해임을 결정하고 새로 위원장을 뽑기로 했어요. 찬성 쪽 사람도 후보로 나오고 저도 얼떨결에 반대쪽 입장의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죠. 결국 제가 위원장으로 뽑혔는데 문제는 도청, 시청 공무원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저보고 사퇴하라는 거예요. 공식적으로 투표해서 뽑힌 사람에게 사퇴하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 도청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압박이 들어와 결국 저는 위원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저를 사퇴시킨 제주도정에 대해 환경단체들과 선흘 마을 이장 명의로 계속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이 일은 한동안 신문, 방송에 도배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어요. 덕분에 다시 위원장직에 복귀해서 2년 임기를 마쳤답니다.

함덕 바다 앞 카페에서 인터뷰 중 | 사진_김연순
홍시 : 제량님은 해양시민과학센터에 가장 먼저 가입한 1호 회원인데요.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제주 바다에 대한 바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량 : 바다와 관련한 활동을 하는 파란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가 대학 때 전공이 해양환경공학인데 정작 해양 쪽 일은 못 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그 일을 한다니 너무 반갑고 고맙더라고요. 어떤 프로그램에서 신주희 씨를 만났는데 “회원 가입 안 받냐” 하니까 “이제 곧 받을 거예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가입할게요” 하고 이름과 주소를 썼어요. 그게 1호 회원이었네요. (웃음) 제주 바다에 대한 바람은 바다가 건강하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제 피부로 느끼잖아요. 해안가에 가면 뭐 없어요. 예전에 그 많던 미역, 보말 같은 거 안 보이고 백화현상으로 하얗게 변해 버린 것을 보면 정말 끔찍하거든요.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회복되면 좋겠어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습니다. 농업도 변해야 하고 우리의 삶도 변해야 하고 환경교육도 변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생태교육이란 말 대신 생태전환교육이라고 하거든요. 단순히 자연을 아는 게 아니라 생태 안에 생명, 평화, 인권, 생태계 이런 것들을 다 다루는 거죠. 제주 섬 전체 삶 자체가 생태적 전환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렵고 먼 길이기는 합니다. 많은 이해관계가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 합니다.
홍시 : 제량님이 제주에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압니다. 건강 잘 챙기시며 일하시고요. 시간 내주시고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 |
어릴 적 소꿉놀이가 지금의 직업으로
고제량 님 인터뷰
홍시의 말
제주에서 나고 자라며 어릴 때부터 유독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 소꿉놀이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키웠고, 자연에 대한 미안함으로 ‘생태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람, 바로 ‘제주생태관광협회’의 고제량 대표입니다. 자연을 보존하면서도 더 나은 지역 주민의 삶에 기여하는 방식의 관광에 몰두하는 고제량(이하 제량) 님을 지난 7월 초에 제주 함덕 바다 앞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홍시 : 고제량 님, 제주에서 나고 자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제량 :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많이 남고 재미있었던 것은 소꿉장난이죠.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 돌조각이나 항아리 깨진 조각, 그리고 풀 같은 것들을 가지고 상도 차려 내고 꽃 장식도 하면서 조그마한 나의 공간을 꾸리며 살았어요. 그 소꿉장난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현재 주소로는 이도2동인데, 제가 1966년생이니까 거기는 아주 산골이었어요. 주변에 인가도 없었고요.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 산골에 자그마한 땅을 사 가지고 들어갔고, 저는 거기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이 과수원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곳이 얼마나 산골이냐 하면, 제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전기와 수도가 들어왔어요. 전화는 제가 대학생 때 들어왔고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집 뒤의 과수원에서 가족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가 고제량님 ⓒ고제량
홍시 : 지금은 번화가인 이도2동이 그때는 그렇게 시골이었다니 놀랍네요. 아무것도 없는 마당에서도 주변에 보이는 온갖 것들이 친구가 되었겠어요.
제량 : 유일한 친구였던 동생, 그리고 한참 떨어진 동네에 있는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놀았죠. 그런데 그 당시 놀았던 경험이 지금 제게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 하면 환경교육을 잘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는데, 사실은 소꿉놀이가 가장 잘 맞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꿉놀이는 식물을 잘 관찰해야 하거든요. 이게 사과를 닮았는지, 배를 닮았는지, 아니면 그릇으로 쓸 수 있는지, 식탁보로 쓸 수 있는지를 다 살펴야 해요. 식물을 잘 관찰하고 만져 보니 촉감도 알게 되고, 흙을 만지면서 흙으로 밥도 짓고 열매와 함께 상을 차리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것들을 상세히 살폈던 기억이 있어요.
홍시 : 제량 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네요. 이제 제량 님께서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그리고 이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량 : ‘생태 관광’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사람들이 자연을 보존하면서 현명하게 이용하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제주생태관광협회’의 대표를 맡아 생태 관광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그 수익으로 먹고살고 있지요.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자연에 대한 미안함에서 출발했어요. 여섯 살 무렵의 일인데요. 어느 날 흙무더기 위에서 놀고 있는데 구멍이 보이는 거예요. 무슨 구멍인가 궁금해서 꽃삽으로 구멍을 계속 팠죠. 파고 또 파고 계속 팠어요. 그런데 그걸 본 열두 살 많은 우리 오빠가 “너 그렇게 구멍 파버리면 그 속에 있는 거 죽어.” 이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뭔가가 죽는다는 생각도 못 했고 그 구멍 속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전혀 생각 못 했죠. 오빠의 말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파다 보니 그 구멍으로 계속 흙이 쏟아지고 있었거든요. 무언가를 내가 죽였다 생각하니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날 정도로 큰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인간 말고 뭔가 다른 죽는 것이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미안함, 부채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홍시 : 인간 이외의 존재, 다른 생명에 대한 인식이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군요. 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생태 관광을 직업으로 삼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한데요?
제량 :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했어요. 전공 공부보다는 시 쓰는 동아리에 들어가 문과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요.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80년대 중반에 학교를 다니면서 선배들 쫓아다니느라 그다지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죠. 그래도 대기기사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서 졸업 후에 첫 직장으로 H호텔의 대기기사 전문가로 취업했어요. 여기서 일하며 우여곡절이 되게 많았고 억울한 일도 많았어요. 그냥 다 그만두고 환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연을 지키는 방법이 뭐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91년 무렵 ‘푸른 이어도의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환경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하다 보니 제주는 ‘관광’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 그 관광이 제주의 환경을 훼손시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환경을 훼손시키는 관광’ 대신 ‘환경을 보존하는 관광’이 필요하다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생태 관광’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1992년 무렵 H호텔 근무 당시 교육 중에 ⓒ고제량
홍시 : ‘생태관광’은 제량님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제량 : 대기기사로 3년을 일했는데 그때는 그냥 돈 버는 직업이었어요. 그것이 특별히 기쁘거나 내가 뭔가 세상에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거든요. 환경을 다루는 대기기사라 하더라도 그때까지는 그저 돈 버는 직업인으로 존재했다면, 생태 관광 분야의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생태 관광은 나의 철학이자 삶인 거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9시 출근, 6시 퇴근이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삶이 일이고 일이 삶이고 그렇게 경계가 없어지더라고요. 시간의 경계도 없고, 제주시건 육지건 장소의 경계도 없이 그저 관련된 일은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생각하며 다니고 있어요. 근데 이제 나이가 드니 몸이 저절로 느려지고 마음도 느긋해지더라고요. 지금은 천천히 내 시간에 맞게 하려 노력하지만, 예전에는 치열하게 일한 것 같아요.
2024년 물장오리습지에서(왼), 2025년 동백동산에서 생태해설하는 모습(오) ⓒ고제량
홍시 : 내 일의 주인,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고 계신 것 같네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잊히지 않는 억울한 일이 있었나요?
제량 : 말도 안 되게 억울한 일 있었죠. 대기기사로 들어간 호텔에서 입사하자마자 저를 ‘미스 고’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리고 부장 사무실 앞에 타자기 있는 테이블을 주면서 거기서 일하래요. 저는 원래 전문직 대기환경기사로 입사한 건데 사무직 비서의 일을 시키더라고요. 그리고는 “커피 타 와라”, “회의 시간에 복사해 와라” 하는 거예요. 저는 “저 커피 안 타요.” “복사 안 해요. 저도 회의 참석할 거예요.” 그랬어요. 또 작업복을 맞춰 주는데 남자들은 다 바지이고 저만 여자라고 치마로 준다는 거예요. “저는 대기를 점검해야 하는 사람이니 치마는 필요 없습니다. 바지로 주세요.” 했지요. 주변 사람들이 다 황당해하면서 ‘쟤 뭐지?’ 하더라고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견딜 만했어요. 환경법에 보일러를 운전하는 업장은 집진기를 설치하여 대기 중으로 나오는 연기를 포집해 매달 검사해야 하거든요. 기준치 이상으로 나오면 벌금을 내고 조치를 취해야 하고요. 그런데 제가 대기기사니까 검사할 때 동행해서 보거든요. 제가 봤을 때 집진기에서 포집을 하면 하얀 필터가 새까매지고 분명 문제가 있는데도 업체에서는 기준치 이하라는 결과를 보내오는 거예요. 어떤 때는 집진기 코드가 뽑혀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문제가 몇 달 동안 계속되었어요. 급기야 제가 그 업체를 찾아갔어요. 제대로 검사하는 거 맞냐, 사실대로 결과 보내달라 했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하는 말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그분이 양심적인 분이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기준치 이상’이라는 결과를 보내왔고 제가 일하던 호텔은 벌금 500만 원을 내게 되었죠. 저는 이제라도 고칠 테니 다행이다 싶어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는 좋은 마음으로 대학 과 선후배 모임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너무너무 억울한 말을 들은 거예요. 과 선배 언니가 제 얘기를 이미 들었는지 “너 그렇게 해서 이 사회 어떻게 살래” 그러는 거예요. 믿었던 선배가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고 너무 억울했어요. 커피 사건, 복사 사건, 치마 사건에 이어 대기오염 기준치 문제까지 소문 다 났다면서 고제량이 지금 반항하고 있고 맹랑하다는 거예요. 내가 커피 타는 것과 복사하는 것을 거부해야 내 여자 후배들이 커피 안 타고 복사 안 하지 않겠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 회사의 문화가 그랬다는 건 이해하지만, 선배의 그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억울하더라고요.
2026년 3월 제주도 습지학교 교사들에게 강의 중 ⓒ고제량
홍시 : 제주도는 특히 개발과 보존의 문제로 첨예한 갈등이 많은 곳이죠. 최근에 겪은 사례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량 :람사르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회는 법정 위원회예요. 저는 거기 전문위원이었고요. 2020년 선흘 지역에 동물테마파크가 들어오는 문제가 생기자 지역 주민들이 ‘동물테마파크 반대 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요. 문제점을 알리며 반대 입장의 보도자료까지 다 나간 상태인데, 어느 날 갑자기 위원장이 확 돌아서며 찬성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주도에 관광 수입을 올리는 거니 찬성하자고요. 이런 위원장을 그냥 둘 수 없었죠. 해임을 결정하고 새로 위원장을 뽑기로 했어요. 찬성 쪽 사람도 후보로 나오고 저도 얼떨결에 반대쪽 입장의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죠. 결국 제가 위원장으로 뽑혔는데 문제는 도청, 시청 공무원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저보고 사퇴하라는 거예요. 공식적으로 투표해서 뽑힌 사람에게 사퇴하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 도청 여기저기에서 엄청난 압박이 들어와 결국 저는 위원장직을 사퇴했습니다. 저를 사퇴시킨 제주도정에 대해 환경단체들과 선흘 마을 이장 명의로 계속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이 일은 한동안 신문, 방송에 도배될 정도로 큰 이슈가 되었어요. 덕분에 다시 위원장직에 복귀해서 2년 임기를 마쳤답니다.
함덕 바다 앞 카페에서 인터뷰 중 | 사진_김연순
홍시 : 제량님은 해양시민과학센터에 가장 먼저 가입한 1호 회원인데요.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제주 바다에 대한 바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량 : 바다와 관련한 활동을 하는 파란이 만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제가 대학 때 전공이 해양환경공학인데 정작 해양 쪽 일은 못 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 그 일을 한다니 너무 반갑고 고맙더라고요. 어떤 프로그램에서 신주희 씨를 만났는데 “회원 가입 안 받냐” 하니까 “이제 곧 받을 거예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가입할게요” 하고 이름과 주소를 썼어요. 그게 1호 회원이었네요. (웃음) 제주 바다에 대한 바람은 바다가 건강하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제 피부로 느끼잖아요. 해안가에 가면 뭐 없어요. 예전에 그 많던 미역, 보말 같은 거 안 보이고 백화현상으로 하얗게 변해 버린 것을 보면 정말 끔찍하거든요. 완전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회복되면 좋겠어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많습니다. 농업도 변해야 하고 우리의 삶도 변해야 하고 환경교육도 변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생태교육이란 말 대신 생태전환교육이라고 하거든요. 단순히 자연을 아는 게 아니라 생태 안에 생명, 평화, 인권, 생태계 이런 것들을 다 다루는 거죠. 제주 섬 전체 삶 자체가 생태적 전환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어렵고 먼 길이기는 합니다. 많은 이해관계가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려고 합니다.
홍시 : 제량님이 제주에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압니다. 건강 잘 챙기시며 일하시고요. 시간 내주시고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