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따라 이야기 따라,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다
고광민 님 인터뷰
홍시의 말 지난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이란 제목으로 제주 큰바다영갤러리에서 제주 해녀들이 실제 사용했던 도구와 해녀들의 옛 사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현장을 샅샅이 다니며 기록하고 수집한 서민생활사학자 고광민(이하 광민) 님의 자료들입니다. ‘제주의 보물이자 이야기보따리’인 고광민 님을 7월 말 제주소통협력센터 1층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
홍시 : 얼마 전에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 전시회에 다녀왔는데요. 다른 전시회와는 달리 전시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하신 특별한 의도가 있으신가요?
광민 : “이디 이신 도구덜 몬 만져보엉 해녀삼춘들 물질 헐 적에 어떵들 써신지 소도리 해보믄 좋으구다마는..”(큰바다영갤러리 대표 고경대 님의 문구) 이렇게 쓰인 문구 보셨죠? 전시된 해녀의 물질 도구들을 직접 만져보면서 제주 바다와 해녀의 물질에 대해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한 겁니다.

고광민 사진•도구 기획전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의 전시물 | 사진_김연순
홍시 : 바다에서 미역이나 톳 같은 해조류를 건져 올리는 도구인 골갱이도 만져봤고요. 해녀용 물안경인 큰눈, 족은눈(작은눈) 같은 걸 만져보면서 설명을 보니 이해가 더 잘 되고 해녀의 삶이나 바다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서민생활사에 대해 연구해 오신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고 동시에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우선 선생님은 제주 어디에서 나고 자라셨는지요?
광민 :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어등개 쪽에서 태어났어요.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죽은 소나무 밑동 썩은 거 괭이로 내리쳐 뽑는 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우리 할머니는 그게 땔감이라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셨죠. 손주가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그러고 노니까요. 고사리 꺾는 것도 좋아하고 바다에서 뭔가 잡아오고 채취하고 뭐 그러고 놀았어요.
홍시 : 선생님 어릴 때인 1960년대 행원리 바다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광민 : 구제기(소라), 오분자기 같은 거 무진장이니까 잡아다가 삶아 먹고 놔줘 버리기도 했죠. 먹을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잡다 보면 집중이 되고 잡념이 사라지는 거야. 학교 갔다 와서 뭔가 채취하고 노는 거, 그 재미로 살았죠. 근데 놀아도 공부 잘한다고 주변에 소문은 났어요.(웃음)
홍시 : 어른들로부터 학교 갔다 와서 일해야 한다든가 그런 압박은 없었나 봐요?
광민 : 부모님은 나한테 별로 신경 안 쓰셨는데 우리 할머니의 철학이 “아이들 기십(제주말로 기)을 꺾어서는 안 된다” 였어요. 지금 돌아보니까 아주 맞는 말이고 중요한 말이에요. 나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 기십을 꺾으려 하지 않고 존중하거든요. 할머니의 영향인 것 같아요.

음식연구소 코삿헌에서 열린 ‘해녀의 식탁’에서 | 사진_김연순
홍시 : 지금은 해상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는 바다인데 그 당시 행원리 바다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광민 : 어마어마했어요. 매역(미역) 조뭄(조물다의 명사형. 해산물 채취를 일정 기간 엄격히 금지했다가 정해진 날에 마을 해녀들이 일제히 채취에 나서는 행위) 날엔 해녀 어머니들 300~400명이 쫙하고 바다로 나가는 거지. 미역은 당시에 생명줄이었거든요. 음력 2,3월이면 추울 때니까 바다에 들어가기 보름 전부터 몸을 준비하며 ‘오합주’를 먹어요. 오합주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술인데 다섯 가지를 섞어 만들어요. 달걀, 참기름, 막걸리 그리고 나머지는 생각 안 나네요. 한라산이 멀리 보여야 용암 바다도 멀리 흘러가거든요. 행원 바다는 한라산이 멀리 보이는 곳이고 해안선 길이로 해녀가 제일 많은 곳이랍니다.
홍시 : 한 바다에서 300~400명이라니요. 대규모인 그 많은 해녀삼춘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광민 : 어릴 땐 그 모습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진짜 장관이더라고요. 지금 또 기억나는 게 해녀들 회의하는 모습이에요. 지금의 고무로 만든 해녀복은 1971년에 생겼는데 그 이전엔 추운 날 잠깐 바다에 들어가도 얼어 죽습니다. 물에 들어가 오래 있으면 추워 죽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회의에서 입수를 몇 시간 할 거냐, 한 시간 반이냐 두 시간이냐 그런 거 정합니다. 모든 걸 불턱에서 딱 결정합니다. 또 행원 마을에 (잘못한 사람 있을 때) ‘이놈 이거 안 되겠다’ 싶으면 회의에서 결정해서 그냥 거의 작살내 버립니다. 내가 열 살 무렵에 본 장면인데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홍시 : 제주의 서민생활사를 공부해 오셨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광민 : 원래 역사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그 당시 제주대학교에 역사학과가 없어서 국문학과에 입학했거든요. 우리 집안이 빨갱이 집안이라 그 당시 공무원은 할 수가 없었는데 교사는 연좌제가 해당이 안 됐어요. 왜 빨갱이 집안이 되었냐면, 우리 외가가 장사를 해서 돈이 많았어요. 외할아버지가 돈이 많으니 부인도 많았을 거 아니에요. 삼촌들이 여럿이었는데 그중 둘이 북한으로 갔어요. 그 사달이 난 게 우리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가고 싶어 했는데 삼촌은 여동생을 학교에 보내주라고 했고 아버지는 “야 이놈의 새끼야. 여자 공부시키면 화냥년 되고 기생되는 거다” 그래가지고 둘이 싸운 거지. 이제 서로 안 본다고 하면서 삼촌 둘이 북한으로 튄 거야.
그런 배경으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귀포에 있는 서귀여상에서 교사로 일했어요. 재직 기간이 2년 7개월인데 학교에 정이 안 붙고 적응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만두고 나와서 그때부터 ‘백성’ 공부를 한 거죠.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 전시 안내를 해주시는 모습 | 사진_부미혜
홍시 : ‘백성’ 공부? 어떤 공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광민 : 한국 땅 전 지역을 다니다가 일본, 중국, 몽골까지 다녔는데요. 예를 들어 4.3만 해도 그래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밑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한 마을 한 마을 이렇게 봐야 제대로 세상이 보이거든요. ‘우뭇개동산’에서 4.3을 보는 것처럼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마을을 무조건 다니는 거예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찾아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해녀어머니’ 만나면 물질 어떻게 했나, 그런 거 물으며 공부했죠. 지금까지 기록한 노트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홍시 : 제주대 박물관 학예사로 30여 년간 일하다 정년퇴임 하신 걸로 압니다. 퇴임 후에도 지금까지 연구하고 현장에서 사람들 만나고 계신데요. 그 여정에서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인지,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언제였는지요?
광민 : 없습니다. 힘들었던 적도 없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할 수 없어요. 지금 한국은 국사편찬위원회는 있는데 역사편찬위원회는 없는 나라예요. ‘백성’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다 싶죠. 그동안 제주도에 대한 것은 거의 다 기록해 출판사에 넘겼어요. 지금은 육지의 진도 밑에 있는 조도와 자은도 기록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꼭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저 허락이 되면 하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기록을 정리할 때 나는 그냥 편집자일 뿐, 말씀해 주신 선생님 입장에서 정리합니다. 그걸 꼭 책으로 낼 생각도 없어요. 정리한 내용 그냥 인터넷에 띄워 버립니다. 버릴까 생각도 합니다.(웃음)

2026 파란 정기총회에서 ⓒ파란
홍시 : 요즘의 제주 바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광민 : 제주 바다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1905년에 성산에 감태 공장이 생기거든요. 러일전쟁으로 유럽에서 요오드 생산이 딱 막혀버리니까 일본 국방성이 제주 바다의 감태에서 요오드를 얻으려고 했어요. 근데 일본이 필요로 하는 요오드의 5분의 1일이 제주 바다에 있는 겁니다. 제주 바다는 화산섬 바다인데 구멍이 숭숭 뚫린 암반이니까 해조류의 섬유질 뿌리가 딱 엉키기가 좋거든. 조선시대 기록 [경세유표]에 조선 백성 절반이 제주도 미역을 먹었다고 나옵니다. 일본 국방성이 전쟁에 필요한 요오드를 제주 감태에서 얻어간 건 그만큼 제주 바다가 특수한 바다라는 거지요. 해조류가 많으니 전복과 구제기가 많고 생명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마을마다 청년들이나 이장들, 도지사까지 몽땅 개발 바람에 빠져 있어요. 이제는 바다에 가기 싫어 안 갑니다. 가면 속이 안 좋으니까. 나도 기성세대로서 죄인입니다. 바다에 대한 행정은 ‘해녀어머니’한테 배우고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배워야 합니다. 바다 관련 공무원들하고 그저 싸울 게 아니라 함께 바다를 바다답게 만드는데 목표를 두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홍시 :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요. 긴 시간 소중한 말씀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 사진_김연순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 |
발걸음 따라 이야기 따라,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다
고광민 님 인터뷰
홍시의 말
지난 5월 20일부터 6월 30일까지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이란 제목으로 제주 큰바다영갤러리에서 제주 해녀들이 실제 사용했던 도구와 해녀들의 옛 사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현장을 샅샅이 다니며 기록하고 수집한 서민생활사학자 고광민(이하 광민) 님의 자료들입니다. ‘제주의 보물이자 이야기보따리’인 고광민 님을 7월 말 제주소통협력센터 1층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홍시 : 얼마 전에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 전시회에 다녀왔는데요. 다른 전시회와는 달리 전시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하신 특별한 의도가 있으신가요?
광민 : “이디 이신 도구덜 몬 만져보엉 해녀삼춘들 물질 헐 적에 어떵들 써신지 소도리 해보믄 좋으구다마는..”(큰바다영갤러리 대표 고경대 님의 문구) 이렇게 쓰인 문구 보셨죠? 전시된 해녀의 물질 도구들을 직접 만져보면서 제주 바다와 해녀의 물질에 대해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한 겁니다.
고광민 사진•도구 기획전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의 전시물 | 사진_김연순
홍시 : 바다에서 미역이나 톳 같은 해조류를 건져 올리는 도구인 골갱이도 만져봤고요. 해녀용 물안경인 큰눈, 족은눈(작은눈) 같은 걸 만져보면서 설명을 보니 이해가 더 잘 되고 해녀의 삶이나 바다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오랫동안 서민생활사에 대해 연구해 오신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고 동시에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우선 선생님은 제주 어디에서 나고 자라셨는지요?
광민 :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어등개 쪽에서 태어났어요.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가 제일 행복했지요. 죽은 소나무 밑동 썩은 거 괭이로 내리쳐 뽑는 게 아주 재미있었어요. 우리 할머니는 그게 땔감이라고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셨죠. 손주가 공부는 안 하고 맨날 그러고 노니까요. 고사리 꺾는 것도 좋아하고 바다에서 뭔가 잡아오고 채취하고 뭐 그러고 놀았어요.
홍시 : 선생님 어릴 때인 1960년대 행원리 바다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광민 : 구제기(소라), 오분자기 같은 거 무진장이니까 잡아다가 삶아 먹고 놔줘 버리기도 했죠. 먹을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잡다 보면 집중이 되고 잡념이 사라지는 거야. 학교 갔다 와서 뭔가 채취하고 노는 거, 그 재미로 살았죠. 근데 놀아도 공부 잘한다고 주변에 소문은 났어요.(웃음)
홍시 : 어른들로부터 학교 갔다 와서 일해야 한다든가 그런 압박은 없었나 봐요?
광민 : 부모님은 나한테 별로 신경 안 쓰셨는데 우리 할머니의 철학이 “아이들 기십(제주말로 기)을 꺾어서는 안 된다” 였어요. 지금 돌아보니까 아주 맞는 말이고 중요한 말이에요. 나도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 기십을 꺾으려 하지 않고 존중하거든요. 할머니의 영향인 것 같아요.
음식연구소 코삿헌에서 열린 ‘해녀의 식탁’에서 | 사진_김연순
홍시 : 지금은 해상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는 바다인데 그 당시 행원리 바다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광민 : 어마어마했어요. 매역(미역) 조뭄(조물다의 명사형. 해산물 채취를 일정 기간 엄격히 금지했다가 정해진 날에 마을 해녀들이 일제히 채취에 나서는 행위) 날엔 해녀 어머니들 300~400명이 쫙하고 바다로 나가는 거지. 미역은 당시에 생명줄이었거든요. 음력 2,3월이면 추울 때니까 바다에 들어가기 보름 전부터 몸을 준비하며 ‘오합주’를 먹어요. 오합주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술인데 다섯 가지를 섞어 만들어요. 달걀, 참기름, 막걸리 그리고 나머지는 생각 안 나네요. 한라산이 멀리 보여야 용암 바다도 멀리 흘러가거든요. 행원 바다는 한라산이 멀리 보이는 곳이고 해안선 길이로 해녀가 제일 많은 곳이랍니다.
홍시 : 한 바다에서 300~400명이라니요. 대규모인 그 많은 해녀삼춘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광민 : 어릴 땐 그 모습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진짜 장관이더라고요. 지금 또 기억나는 게 해녀들 회의하는 모습이에요. 지금의 고무로 만든 해녀복은 1971년에 생겼는데 그 이전엔 추운 날 잠깐 바다에 들어가도 얼어 죽습니다. 물에 들어가 오래 있으면 추워 죽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회의에서 입수를 몇 시간 할 거냐, 한 시간 반이냐 두 시간이냐 그런 거 정합니다. 모든 걸 불턱에서 딱 결정합니다. 또 행원 마을에 (잘못한 사람 있을 때) ‘이놈 이거 안 되겠다’ 싶으면 회의에서 결정해서 그냥 거의 작살내 버립니다. 내가 열 살 무렵에 본 장면인데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홍시 : 제주의 서민생활사를 공부해 오셨는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광민 : 원래 역사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그 당시 제주대학교에 역사학과가 없어서 국문학과에 입학했거든요. 우리 집안이 빨갱이 집안이라 그 당시 공무원은 할 수가 없었는데 교사는 연좌제가 해당이 안 됐어요. 왜 빨갱이 집안이 되었냐면, 우리 외가가 장사를 해서 돈이 많았어요. 외할아버지가 돈이 많으니 부인도 많았을 거 아니에요. 삼촌들이 여럿이었는데 그중 둘이 북한으로 갔어요. 그 사달이 난 게 우리 어머니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가고 싶어 했는데 삼촌은 여동생을 학교에 보내주라고 했고 아버지는 “야 이놈의 새끼야. 여자 공부시키면 화냥년 되고 기생되는 거다” 그래가지고 둘이 싸운 거지. 이제 서로 안 본다고 하면서 삼촌 둘이 북한으로 튄 거야.
그런 배경으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귀포에 있는 서귀여상에서 교사로 일했어요. 재직 기간이 2년 7개월인데 학교에 정이 안 붙고 적응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만두고 나와서 그때부터 ‘백성’ 공부를 한 거죠.
<물질, 제주 해녀의 갯곳 생활> 전시 안내를 해주시는 모습 | 사진_부미혜
홍시 : ‘백성’ 공부? 어떤 공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광민 : 한국 땅 전 지역을 다니다가 일본, 중국, 몽골까지 다녔는데요. 예를 들어 4.3만 해도 그래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밑에서 한 사람 한 사람, 한 마을 한 마을 이렇게 봐야 제대로 세상이 보이거든요. ‘우뭇개동산’에서 4.3을 보는 것처럼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마을을 무조건 다니는 거예요. 할머니 할아버지들 찾아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나, ‘해녀어머니’ 만나면 물질 어떻게 했나, 그런 거 물으며 공부했죠. 지금까지 기록한 노트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홍시 : 제주대 박물관 학예사로 30여 년간 일하다 정년퇴임 하신 걸로 압니다. 퇴임 후에도 지금까지 연구하고 현장에서 사람들 만나고 계신데요. 그 여정에서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인지,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언제였는지요?
광민 : 없습니다. 힘들었던 적도 없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할 수 없어요. 지금 한국은 국사편찬위원회는 있는데 역사편찬위원회는 없는 나라예요. ‘백성’의 입장에서 봐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제가 해야 할 일이다 싶죠. 그동안 제주도에 대한 것은 거의 다 기록해 출판사에 넘겼어요. 지금은 육지의 진도 밑에 있는 조도와 자은도 기록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꼭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저 허락이 되면 하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기록을 정리할 때 나는 그냥 편집자일 뿐, 말씀해 주신 선생님 입장에서 정리합니다. 그걸 꼭 책으로 낼 생각도 없어요. 정리한 내용 그냥 인터넷에 띄워 버립니다. 버릴까 생각도 합니다.(웃음)
2026 파란 정기총회에서 ⓒ파란
홍시 : 요즘의 제주 바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광민 : 제주 바다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1905년에 성산에 감태 공장이 생기거든요. 러일전쟁으로 유럽에서 요오드 생산이 딱 막혀버리니까 일본 국방성이 제주 바다의 감태에서 요오드를 얻으려고 했어요. 근데 일본이 필요로 하는 요오드의 5분의 1일이 제주 바다에 있는 겁니다. 제주 바다는 화산섬 바다인데 구멍이 숭숭 뚫린 암반이니까 해조류의 섬유질 뿌리가 딱 엉키기가 좋거든. 조선시대 기록 [경세유표]에 조선 백성 절반이 제주도 미역을 먹었다고 나옵니다. 일본 국방성이 전쟁에 필요한 요오드를 제주 감태에서 얻어간 건 그만큼 제주 바다가 특수한 바다라는 거지요. 해조류가 많으니 전복과 구제기가 많고 생명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마을마다 청년들이나 이장들, 도지사까지 몽땅 개발 바람에 빠져 있어요. 이제는 바다에 가기 싫어 안 갑니다. 가면 속이 안 좋으니까. 나도 기성세대로서 죄인입니다. 바다에 대한 행정은 ‘해녀어머니’한테 배우고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배워야 합니다. 바다 관련 공무원들하고 그저 싸울 게 아니라 함께 바다를 바다답게 만드는데 목표를 두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홍시 : 현장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요. 긴 시간 소중한 말씀 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 사진_김연순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