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프린트] 인류세의 바다와 ‘인간 너머의 정의’ | 최명애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파래
20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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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의 바다와 ‘인간 너머의 정의’


최명애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인류세는 인간의 경제적 활동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해 제안된 새로운 지질 시대의 이름이다. ‘인류세’라는 이름은 현재의 생태사회적 위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다양한 비판을 받아 왔다. 대표적인 비판은, 생태사회적 위기의 근본 원인이 식민주의 팽창에 기반한 서구 자본주의의에 있음에도 이를 ‘인간’이라는 모호한 범주로 일반화한다는 점이다. 또한 현재 위기는 생물다양성 소실, 지구 표면의 생지화학적 순환 교란, 해양 산성화 등 다양한 문제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인데, 기후 위기만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기술 중심의 탄소 감축에만 몰두하게 하고, 보다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을 가로막는다는 지적도 있다. 

[참고] 한림해상풍력 단지 ©파란


이러한 인류세 논의에서 종종 간과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점은 바로 ‘해양’이다. 기후 문제 해결 중심의 논의 속에서 바다는 탄소 흡수원이자 재생에너지 설비 설치의 물리적 공간으로만 여겨진다. 해상 풍력 발전 확대 논의가 대표적이다. 해상풍력은 육상풍력에 비해 입지 선정이나 운영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재생 에너지다. 육상에 비해 설비 규모나 고도 제한에서 자유롭고, 바다 위에 설치되기 때문에 거주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소음이나 경관 훼손 문제에서도 유리하다. 때문에 정부의 재생에너지 드라이브의 핵심에는 해상 풍력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 2024년 현재 상업 운전 중인 해상풍력발전단지는 제주 탐라 등 세 곳에 불과하지만, 허가를 받은 곳은 80개 단지를 넘는다. 제주에서도 추자도 인근 해역에 3기가와트(GW) 규모의 해상풍력단지가 추진되고 있다. 


남방큰돌고래 ©파란


해상풍력발전 논의에서 바다는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할 수 있는 부지’로 재구성된다. 풍력발전단지 설치와 운영이 남방큰돌고래와 같은 해양 포유류, 서해의 섬과 연안을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는 철새, 갯벌의 저서생물과 같은 다양한 해양 생물의 삶과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좀처럼 논의되지 않는다. 나아가, 기후 위기의 근본 원인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양 생물의 서식지를 희생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를 새롭게 묻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이 모두 함께 겪고 있는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다른 종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해상풍력확대는 다종적으로 ‘불의’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기후 정의’는 기후 위기로 인한 위험과 피해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기후 위기 대응의 절차와 효과를 보다 민주적으로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최근의 기후 정의 논의는 기후 위기의 피해자가 특정 인간 집단만이 아니며, 인간 행위자 중심으로 발전시켜 온 기후 정의 논의를 비인간 존재를 포함한 다종의 세계로 확장하고자 한다. 이른바 ‘인간 너머의 정의’를 ‘기후 정의’에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종의 세계는 인간 뿐 아니라 동물, 식물, 미생물까지 다양한 존재들이 모순되고 상충하는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 한 종에게 정의로운 결정이 반드시 다른 종에게도 이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다른 종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불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때 정의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속에서 맥락적으로 드러난다. 환경사회학자 레이드는 다종적 정의를 관계망에 결합된 존재들의 ‘번성’을 지향하는 관계에서 찾는다. 다른 종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취약성을 알아차리며,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서 비로소 다종적 정의의 가능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해상풍력발전 확대는 이러한 다종적 연결망을 확대하는 대신, 오히려 연안을 매개로 인간과 비인간이 맺어왔던 다종적 연결망을 끊어내는 듯하다. 바다는 돌고래, 철새, 물고기, 저서생물 등 다양한 비인간 동물의 서식처이자, 해양 생물에 기대어 살아가는 어민의 삶터이기도 하다. 연안의 인간과 비인간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생활과 생계의 다종적 연결망을 구성하고 작동시켜 왔다. 그러나 해상풍력발전 논의 속에서 연안이 다종적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은 탈각되고, 연안은 대규모 재생에너지 설비를 빠르게 설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환원된다. 이 과정에서 어민의 피해는 비교적 가시화되고 논의의 장에 포함되지만, 비인간 동식물과 생태계가 입을 피해는 종종 누락되거나 축소된다. 인간만이 해상풍력발전 확대의 피해자로, 비인간 존재들은 발전단지 예정 부지의 존재감 없는 일부로 재구성되면서 연안의 다종적 공동체의 연결망이 해체되는 것이다. 다종적 ‘연결’ 대신 ‘분리’를 강화하고, 인간에게만 예외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해상풍력발전 논의는 인류세 위기의 원인으로 꼽혀온 인간중심주의적, 인간예외주의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듯하다.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과 돌핀맨의 '상괭이편' 프로젝트에서 촬영한 추자도 상괭이 ©파란


이같은 상황에서 해상풍력 발전 예정지에 존재하는 비인간 생명에 주목하고, 해상풍력발전 확대가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는 중요하다. 한국환경연구원과 국립생태원의 서해 괭이갈매기 서식지 조사, 제주 해양 환경단체 핫핑크 돌핀스의 남방큰돌고래 보호 활동, 추자도 해상풍력단지가 상괭이에게 미칠 영향을 조사하는 파란의 ‘상괭이편’ 프로젝트는 인간중심주의의 포화 속에서 바다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괭이갈매기, 남방큰돌고래, 상괭이를 드러냄으로서 해상풍력발전의 연결망을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확장하고, 해상풍력발전 확대의 연결망과 구분되는 새로운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안은 비단 풍력단지 예정부지나 어민의 어장만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삶을 꾸려가는 다종적 삶의 공간으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이들의 노력이 인류세 시대의 바다에서 ‘인간 너머의 정의’를 모색하는 새로운 실험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며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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