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임형묵 | 깅이와 바당 대표, 해양다큐멘터리 감독
가끔 조수웅덩이 속 생물들을 보며 ‘과연 이들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생각이란 것이 있기는 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조그만 웅덩이에 작은 먹이를 하나 던져 놓으면 가장 먼저 냄새를 맡은 줄새우아재비가 다가오고 활달한 성격의 무늬망둑이 나타난다. 작은 집게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진다. 상대적으로 게들은 조심성이 많아 빼꼼 몸을 내밀었다가도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얼른 숨어 버린다. 다른 게들과 달리 물에 녹아 떠다니는 부유물을 걸러 먹을 수 있는 납작게는 깃털 같은 턱다리를 부지런히 휘저으며 멀리서나마 먹이의 맛을 음미한다. 웅덩이 어딘가 숨어있던 민꽃게가 큰 집게발을 위협적으로 벌리고 나와 다른 생물들을 쫓아낸 뒤 먹이를 독차지하기도 한다.

조수웅덩이의 상위 포식자 민꽃게 ©임형묵
이런 광경은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도 늘 벌어지는 일상의 단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냥 설계대로 움직이는 기계 부품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자기의 의지는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의 세계는 그저 세상을 유지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서구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근대 철학에 서도 생각과 사유는 인간의 전유물로 여겼다. 동양사상의 생명윤리는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더 현대의 일반적인 정서와 가깝지만, 한편으론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경향도 있다.
이제는 사람 또한 생물의 하나이며 진화의 산물이고 진화의 개념에는 더 진화하거나 덜 진화한 것이 없이 모든 생물의 현재 상태가 동등한 진화의 결과이며 또 그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비교하며 구분 짓고 싶어 한다. 물론 모든 생물의 생김과 생태가 다르듯 인간만의 특질이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다른 생물 전체와 구분되는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데카르트 같은 천재조차 생각은 인간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집에서 같이 사는 강아지, 고양이만 봐도 그들 역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개들보다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고래나 돌고래, 유인원, 심지어 머리 나쁜 것의 대명사였던 새들 가운데 일부는 어린아이만큼이나 지능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동물은 생각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동물도 생각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후에도 사람들은 굳이 사람의 생각과 동물의 생각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의식이다. 동물은 순간순간 생존을 위한 판단을 할 뿐 자아를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린 의심이 너무 많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세상은 나를 위한 배경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는 엑스트라들이 아닐까 하는 자의식 과잉의 경험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자아라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증명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만 정작 자기 얼굴은 안 보이는 1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보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쉬워도 정서적으로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요즘이야 워낙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많이 촬영하고 자신이 나오는 이미지가 많다 보니 내가 저렇게 생겼고 사람들 무리 중 하나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지만, 과거엔 거울이 그 역할을 했다. 세상 모든 것의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비치니 거울 속 사람이 아무리 못생겼어도 그것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거울 테스트다. 거울을 보고 그 안의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면 자아가 있는 것이 증명된다는 실험이다. 그런데 정작 실험 대상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본 소감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서 이 실험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언어 대신 객관적 증명을 위해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바로 마커이다.
요즘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예전엔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가면 밤에 친구들 얼굴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증이 유행했다. 나 역시 심하게 앓던 병이다, 유성매직은 잘 지워지지 않아서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까지 피해자들의 얼굴에 남은 내 작품의 흔적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몇몇이 그런 작당을 벌이는 동안 몰래 먹은 술기운에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친구들은 아침에 일어나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이 뭔가 이상하고 키득키득 웃기라도 할 때, 그제야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고 온갖 욕을 하며 물로 닦아내려 한다. 이런 낙서가 바로 거울 실험의 마커이다.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마커를 찍거나 붙여 놓고 실험 대상이 거울을 본 후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거울 실험을 통과한 동물은 유인원과 고래류 그리고 까마귀 등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동물 중 일부이다. 같은 종이라도 개체마다 차이가 크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개나 고양이는 탈락했다. 그런데 물고기 중에도 이 거울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 있다. 다이빙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다큐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청줄청소놀래기이다. 커다란 물고기의 입과 아가미 속을 들락거리며 기생충을 청소해 주는 손가락만큼 작고 길쭉한 물고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오사카공립대의 고다 마사노리교수 연구팀은 물고기 인지능력과 관련된 여러 연구를 하던 중 거울 테스트를 해보기로 하고 가장 적합한 물고기로 이 청줄청소놀래기를 선정했다. 이것은 이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의 심리와 습성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지능이 있고 먹이인 기생충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육 수조에 거울을 설치해서 익숙해지도록 한다.
2. 물고기를 마취해 턱 아래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갈색 점을 찍는다.
3, 다시 수조에 넣어두면 깨어나 활동한다.
3. 거울에 비친 갈색 점을 본 이후 바닥에 그 부분을 비벼 떼어내려고 한다.

청줄청소놀래기 미러 테스트(출처 https://journals.plos.org/)
이 실험 결과가 자의식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에는 여전히 이견이 있지만, 이 외에도 물고기의 인지능력, 기억력, 판단력 등 일반적으로 지능이라 할만한 것을 증명한 사례는 아주 많다.
내 경험으로도, 앞동갈베도라치가 놀라운 기억력으로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다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돌돔이 훈련을 받은 돌고래나 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묘기를 아주 쉽게 수행하는 것도 목격했다. 제주 바다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호박돔은 성게를 물어 돌에 내던져 깨뜨려 먹는데 이것은 충분히 도구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훈련 2주 만에 고리 통과 묘기를 선보이는 돌돔 흰검둥이
여러 연구를 통해 물고기는 얼굴의 형태와 무늬의 패턴으로 다른 물고기를 기억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종뿐 아니라 특정한 사람도 기억한다. 일본 지바현 바다에 사는 요리코라는 혹돔은 아라카와 히로유키라는 다이버 할아버지와 40년 넘게 우정을 유지했고 옥스포드와 퀸즈랜드대학의 공동 연구에서 물총고기는 44개의 얼굴 그림 중 자기에게 익숙한 단 한 명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찾아내기도 했다.

물총고기 얼굴 기억 실험(출처 https://www.nature.com/)
고다 마사노리 교수는 더 많은 동물이 그 정도의 지능이나 인지능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마치 종의 분화처럼 자의식 또한 시작과 끝의 명확한 경계가 없이 점진적이고 중첩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자의식이 반드시 척추동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척추동물인 문어는 이미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고 게를 오래 관찰해보면 게도 기억력이 있고 훈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수준이 자의식에 못 미치더라도 그들 또한 나름의 1인칭 사고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생물의 자의식이나 지능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인간의 모습 그대로 갑자기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처럼 자연 생태의 일원들도 서로 유기적,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럼 그들은 왜 그런 능력이 필요할까? 생물끼리도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경우도 있고 누가 그 동네에서 왕이 될 상인지, 친구나 적이 될 상인지 판단해야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대체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사유할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존재도 나와 같은 자아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지능의 최종 단계는 자의식이 아니라 타 생명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위해주는 이타성이다. 나의 생존에 직결되는 관계를 넘어서서 공존공영까지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지구상에 등장한 수많은 생물 중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지만 이젠 지피지기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임형묵 | 깅이와 바당 대표, 해양다큐멘터리 감독
가끔 조수웅덩이 속 생물들을 보며 ‘과연 이들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일까? 생각이란 것이 있기는 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조그만 웅덩이에 작은 먹이를 하나 던져 놓으면 가장 먼저 냄새를 맡은 줄새우아재비가 다가오고 활달한 성격의 무늬망둑이 나타난다. 작은 집게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진다. 상대적으로 게들은 조심성이 많아 빼꼼 몸을 내밀었다가도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얼른 숨어 버린다. 다른 게들과 달리 물에 녹아 떠다니는 부유물을 걸러 먹을 수 있는 납작게는 깃털 같은 턱다리를 부지런히 휘저으며 멀리서나마 먹이의 맛을 음미한다. 웅덩이 어딘가 숨어있던 민꽃게가 큰 집게발을 위협적으로 벌리고 나와 다른 생물들을 쫓아낸 뒤 먹이를 독차지하기도 한다.
조수웅덩이의 상위 포식자 민꽃게 ©임형묵
이런 광경은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도 늘 벌어지는 일상의 단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그냥 설계대로 움직이는 기계 부품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자기의 의지는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의 세계는 그저 세상을 유지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서구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오랫동안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믿었고 근대 철학에 서도 생각과 사유는 인간의 전유물로 여겼다. 동양사상의 생명윤리는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더 현대의 일반적인 정서와 가깝지만, 한편으론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에 머무르는 경향도 있다.
이제는 사람 또한 생물의 하나이며 진화의 산물이고 진화의 개념에는 더 진화하거나 덜 진화한 것이 없이 모든 생물의 현재 상태가 동등한 진화의 결과이며 또 그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은 인간과 다른 동물을 비교하며 구분 짓고 싶어 한다. 물론 모든 생물의 생김과 생태가 다르듯 인간만의 특질이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다른 생물 전체와 구분되는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데카르트 같은 천재조차 생각은 인간만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집에서 같이 사는 강아지, 고양이만 봐도 그들 역시 생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개들보다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고래나 돌고래, 유인원, 심지어 머리 나쁜 것의 대명사였던 새들 가운데 일부는 어린아이만큼이나 지능이 높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동물은 생각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동물도 생각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후에도 사람들은 굳이 사람의 생각과 동물의 생각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의식이다. 동물은 순간순간 생존을 위한 판단을 할 뿐 자아를 인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린 의심이 너무 많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도 세상은 나를 위한 배경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는 엑스트라들이 아닐까 하는 자의식 과잉의 경험이 있지 않을까?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자아라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증명하기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만 정작 자기 얼굴은 안 보이는 1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보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머리로는 이해가 쉬워도 정서적으로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요즘이야 워낙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많이 촬영하고 자신이 나오는 이미지가 많다 보니 내가 저렇게 생겼고 사람들 무리 중 하나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지만, 과거엔 거울이 그 역할을 했다. 세상 모든 것의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비치니 거울 속 사람이 아무리 못생겼어도 그것이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 거울 테스트다. 거울을 보고 그 안의 모습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면 자아가 있는 것이 증명된다는 실험이다. 그런데 정작 실험 대상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본 소감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서 이 실험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언어 대신 객관적 증명을 위해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바로 마커이다.
요즘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예전엔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가면 밤에 친구들 얼굴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강박증이 유행했다. 나 역시 심하게 앓던 병이다, 유성매직은 잘 지워지지 않아서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때까지 피해자들의 얼굴에 남은 내 작품의 흔적을 보며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몇몇이 그런 작당을 벌이는 동안 몰래 먹은 술기운에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친구들은 아침에 일어나 다른 아이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이 뭔가 이상하고 키득키득 웃기라도 할 때, 그제야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고 온갖 욕을 하며 물로 닦아내려 한다. 이런 낙서가 바로 거울 실험의 마커이다.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마커를 찍거나 붙여 놓고 실험 대상이 거울을 본 후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거울 실험을 통과한 동물은 유인원과 고래류 그리고 까마귀 등 머리가 좋다고 알려진 동물 중 일부이다. 같은 종이라도 개체마다 차이가 크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개나 고양이는 탈락했다. 그런데 물고기 중에도 이 거울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 있다. 다이빙을 해본 적 없는 사람도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다큐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청줄청소놀래기이다. 커다란 물고기의 입과 아가미 속을 들락거리며 기생충을 청소해 주는 손가락만큼 작고 길쭉한 물고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오사카공립대의 고다 마사노리교수 연구팀은 물고기 인지능력과 관련된 여러 연구를 하던 중 거울 테스트를 해보기로 하고 가장 적합한 물고기로 이 청줄청소놀래기를 선정했다. 이것은 이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의 심리와 습성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지능이 있고 먹이인 기생충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육 수조에 거울을 설치해서 익숙해지도록 한다.
2. 물고기를 마취해 턱 아래 기생충을 연상시키는 갈색 점을 찍는다.
3, 다시 수조에 넣어두면 깨어나 활동한다.
3. 거울에 비친 갈색 점을 본 이후 바닥에 그 부분을 비벼 떼어내려고 한다.
청줄청소놀래기 미러 테스트(출처 https://journals.plos.org/)
이 실험 결과가 자의식이 있다는 증거라는 것에는 여전히 이견이 있지만, 이 외에도 물고기의 인지능력, 기억력, 판단력 등 일반적으로 지능이라 할만한 것을 증명한 사례는 아주 많다.
내 경험으로도, 앞동갈베도라치가 놀라운 기억력으로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다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돌돔이 훈련을 받은 돌고래나 개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묘기를 아주 쉽게 수행하는 것도 목격했다. 제주 바다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호박돔은 성게를 물어 돌에 내던져 깨뜨려 먹는데 이것은 충분히 도구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훈련 2주 만에 고리 통과 묘기를 선보이는 돌돔 흰검둥이
여러 연구를 통해 물고기는 얼굴의 형태와 무늬의 패턴으로 다른 물고기를 기억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종뿐 아니라 특정한 사람도 기억한다. 일본 지바현 바다에 사는 요리코라는 혹돔은 아라카와 히로유키라는 다이버 할아버지와 40년 넘게 우정을 유지했고 옥스포드와 퀸즈랜드대학의 공동 연구에서 물총고기는 44개의 얼굴 그림 중 자기에게 익숙한 단 한 명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찾아내기도 했다.
물총고기 얼굴 기억 실험(출처 https://www.nature.com/)
고다 마사노리 교수는 더 많은 동물이 그 정도의 지능이나 인지능력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마치 종의 분화처럼 자의식 또한 시작과 끝의 명확한 경계가 없이 점진적이고 중첩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자의식이 반드시 척추동물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척추동물인 문어는 이미 머리가 좋기로 유명하고 게를 오래 관찰해보면 게도 기억력이 있고 훈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수준이 자의식에 못 미치더라도 그들 또한 나름의 1인칭 사고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 이런 생물의 자의식이나 지능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 인간의 모습 그대로 갑자기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우리처럼 자연 생태의 일원들도 서로 유기적,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럼 그들은 왜 그런 능력이 필요할까? 생물끼리도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경우도 있고 누가 그 동네에서 왕이 될 상인지, 친구나 적이 될 상인지 판단해야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인간은 대체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더 많은 기억을 저장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서도 더 깊이 사유할 수 있고 그 결과 다른 존재도 나와 같은 자아가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지능의 최종 단계는 자의식이 아니라 타 생명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위해주는 이타성이다. 나의 생존에 직결되는 관계를 넘어서서 공존공영까지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지구상에 등장한 수많은 생물 중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지만 이젠 지피지기해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