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의 말 : 파란 회원 인터뷰를 하며 그동안 바다와 직접 관련된 활동을 하는 회원을 만나 왔습니다. 이번 다섯 번째 주인공은 좀 다릅니다. 다이버도 아니고 해녀도 아닌 이신율 회원은 총회 참석이 파란 회원으로서 첫 활동이고, 총회가 매우 편안하고 좋았다고 합니다. 함덕에 살며 함덕 바다를 사랑하는 이신율(이하 신율) 회원을 만나 봅니다.
홍시 : 반갑습니다. 신율! 바다와 관련한 직접 활동을 하는 회원이 아닌 분으로는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신율 : 제가 처음이라고요.(와와 손뼉 치며 환호)
홍시 : 신율의 바다에 대한 첫 기억은 어떤지 궁금해요. 어떤 기억이 있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신율 : 저는 강원도에서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살았어요. 그때 동해 바다를 갔던 게 바다에 대한 첫 기억이에요. 바다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파도와 동해 깊은 바다에 빠질까 봐 무서웠어요. 왜 선택하는 거 있잖아요. 바다냐 숲이냐, 이러면 항상 숲 선택하고 이랬거든요. 그러다가 12년 전에 제주도에 처음 놀러 와서 바다를 봤는데, 바다가 수면 위로 야트막하고 넓게 펼쳐져 있고 사납지 않다고 느꼈어요. 그중에서도 제게는 함덕이 제일 안전하다고 느껴졌지요. 수영도 못하고 많이 무서워하는데 함덕 바다에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원래 바다에 들어가 놀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수영복도 안 챙겨 왔고 그날 바로 비행기 타고 집으로 올라가야 되는 일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상태로 그냥, 입은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 버린 거예요. 바다에서 막 놀고는 그냥 근처 식당 화장실에 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게 바다와의 첫 좋은 기억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뒤로 거의 매년 함덕 바다에 왔어요. 그러다가 아예 이사까지 하게 되었죠.
홍시 : 바다의 무엇이 그렇게 신율을 이끌었을까요?
신율 : 사실 바다는 지금도 무섭거든요. 저는 다른 사람들 보다 추위를 훨씬 많이 타요. 색깔도 파란색 하얀색 이런 색을 싫어하고 따뜻한 색만 좋아해요. 그런데 함덕이 갈색이 되게 많아요. 서우봉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그래서 제가 여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광활한 수평선과 가로줄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따뜻한 색감과 서우봉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제가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홍시 : 지난여름에도 바다에 들어갔나요?
신율 : 매일 밤 갔어요. 바다가 되게 얕으니까 밤에도 안전하게 느껴지고 저기 서우봉 앞에 작은 해변이 있거든요. 거기는 얕아서 매일 밤바다에 들어갔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어싱(earthing), 동네 주민들과 어싱을 하고 밤 수영하고 집에 들어가요.
홍시 : 밤에 바다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이에요?
신율 : 물속에 들어가면 제 귀에만 들리는 그 소리가,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그게 좋았어요.
함덕바다에서 반려인 나랑과 반려견 부우와 함께
홍시 : 신율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는지도 소개해 주세요.
신율 : 이거는 인터뷰에 안 들어가겠지만 솔직한 말로 뭐 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함께 웃음) 뭐 하며 사나 생각할 땐 약간 아득해지는데 어쨌든,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은 여성주의와 관련된 일과 활동을 하고 있어요. 스무 살에 여성주의자 언니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재밌고 좋은 말들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네트워크라는 커뮤니티에 발을 담그게 된 거죠. 그전엔 여성주의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006년 무렵 제가 대학교 1학년, 스무 살이었는데 그 당시 많은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이렇게 시작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저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 좀 극단적인 사람들이 하는 거 아냐?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언니네트워크가 여는 캠프 기획단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뭔지도 모르고 그냥 친구 따라 간 거예요. 1박 2일 회의였고 장소가 여성플라자였어요.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다 닉네임을 말하더니 다 함께 존댓말을 하던지 아님 반말을 하던지 하자는 거예요. 나이와 상관없이요. 저한텐 이게 엄청난 문화 충격이었어요. 그리고는 캠프에서 꼭 지켰으면 하는 약속들을 정하는데, 어떤 사람은 벌레나 곤충이 나와도 함부로 죽이지 말자는 걸 넣자고 하는 거예요.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걸 약속으로 정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모기는 죽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이야기도 하고요. 가자마자 이런 얘기를 너무 길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슈는 지금 생각해도 답이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그런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대학교 1학년이 캠프 하면, 국토대장정 같은 걸 생각했지 이런 섬세한 감수성을 다룰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근데 그게 참 좋았어요. 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다, 안전한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뒤로 이 언저리에 계속 놀고먹고 하다 보니까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성평등 교육이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관련해서 기획하고 강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시 : 자기방어훈련, 궁금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어떤 내용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신율 : 자기방어훈련은 제가 20대 초반에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곳에서 반성폭력 문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6개월짜리 프로젝트였는데 매주 기획단이랑 10대 청소녀들이 같이 만나서 몸 훈련을 하는 거예요. 강사는 여성들이었는데 태권도 선생님도 수영 선생님도 계셨어요. 다양한 선생님들 만나서 몸 훈련하고 마지막에는 3박 4일 다 함께 지리산 종주로 마쳤지요. 제가 그때 많이 달라졌거든요. 아버지가 군인이셨고 군인 가족으로 살다 보니 내가 예의를 잘 지키고 있나, 민폐가 되면 안 된다, 과민할 정도로 신경 쓰며 살았어요. 그러다 보면 위축이 되잖아요. 처음엔 자기방어훈련이 강간 위험 시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훈련,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훈련을 다 마치고 나니 달라진 점은 평소에 사람들한테 거절하는 게 어려웠는데, 그게 좀 가능해졌다거나 협상을 하는 게 좀 가능해졌어요. 일상에서의 변화를 제가 직접 느끼게 된 거죠. 일원으로 참여했다가 이건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어요. 같은 대학의 페미니스트 선배 친구와 의기투합해 웹자보 그냥 만들어 여성태권도연맹 선생님 섭외해서 프로그램 기획했지요. 근데 그때는 사람들이 다 심심했던 것 같아요. 스마트폰 이전 시대라서 10주짜리 프로그램에 스무 명이 다 찬 거예요. 지원금 없이 모두 자기 돈 20만 원 내구요. 그때 18주짜리 프로그램도 했어요. 지금이면 못할 것 같아요. 사람들도 이제 다른 재밌는 게 많잖아요.
그게 제가 그냥 제가 살면서 해본 거 중에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소리 지르고 송판 격파하고 아니면 친구랑 같이 막 훈련하다 한 명 팔 부러지고. 근데 그게 약간 훈장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같이 술집 갔는데 여자들한테 뭐라고 하면, 막 싸움닭처럼 싸우고. 그런 경험이 위축되어 있던 제가 활개를 펼친 경험이 된 것 같아요. 그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제가 대학 때 교생 실습했거든요. 사회 교사였는데 어느 특목고 여고에서 실습했어요. 교생 실습 때 같이 자기방어 훈련하고 소리 지르기 훈련하고 그랬어요. 수능 안 보고 곧 실습 나갈 학생들이어서 애들이 너무나 좋아했어요. 같이 욕하기 훈련하고. 욕설도 내뱉어 봐야 필요할 때 딱 나지막하게 할 수 있거든요.(함께 웃음) 욕은 안 하는 게 좋지만 해야 할 땐 할 수 있어야 위험한 상대를 협박할 수 있거든요.
홍시 : 자기방어훈련이 신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몸도 그렇지만 마음가짐, 그리고 정신세계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자존감도 확 높아지고요.
신율 : 근데 그렇게 자존감이 쉽게 높아지는 건 아니 더라고요.(함께 웃음)
자기방어훈련 시 시범을 보이는 신율
홍시 : 제주도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신율 : 2018년부터 자기방어훈련을 열심히 했더니 여러 곳에서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언니네트워크나 살림의료사협 같은 데서요. 한 3년 재밌게 하려고 했고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서 프로젝트도 지원받았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거예요. 그래서 운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내년에는 괜찮겠지, 또 다음 해엔 괜찮겠지 했는데 계속되더라고요.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생각하고 제주 함덕으로 오게 된 거죠. 원래 1년만 살고 다시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그냥 눌러앉게 되었어요. 함덕이 좋았나 봐요.
홍시 : 제주에 와서는 자기방어훈련을 제주여민회랑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신율 : 제주여민회에는 2030 위원회가 있는데 거기랑 연결이 되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홍보물 보고는 여민회랑 관계없는 분들도 많이 오셨어요. 대체로 이주민들이었고 1인 가구 여성들이었어요. 사람들이 늦은 시간 시내에서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은 버스에서 좀 무섭다고 느낀 사람이 있는데 자기방어훈련을 해 보니까 어떻게 대응해야겠다 하는 시뮬레이션이 그려지더래요. 아무 일 일어나진 않았지만 위축된 상태로 20분을 가던 이전과는 달리 이렇게 해봐야지, 저렇게 해봐야지 생각하며 가는 20분은 다르잖아요. 자기효능감이 있는 20분이잖아요. 참가자들에게 그런 피드백을 들었던 게 제일 좋았어요.
홍시 : 그랬을 것 같아요. 여민회 자기방어훈련 홍보물 봤을 때 너무 하고 싶었는데 2030 세대만 대상이겠거니 하고 전 신청 안 했지요. 혹시 올해 5060을 위해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장소 찾고 사람 모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누구나 자기방어훈련 필요할 거 같은데.
신율 : 맞아요. 누구나 필요하죠. 사람만 모아지면 할 수 있고요.
홍시 : 파란 회원은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어요?
신율 : 솔직히 말하면 홍시 때문이요.(함께 웃음) 세상에 후원할 곳은 너무 많잖아요. 하고 싶은 곳이야 50군데도 넘죠. 근데 주변에 활동가가 있으면 하는 것 같아요. 진짜 가입은 홍시가 하니까 했어요. 가입하고 나서 좋았던 점은 있죠. 바다 관련 이슈에 대응하는 활동 이렇게만 알았는데 파란에서 시민들의 참여, 이걸 계속 강조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여성운동도 퀴어 운동도 다 모두의 참여를 독려하는 거죠. 기후변화 이런 거 너무나 큰 이슈이고 관찰, 데이터 측정 같은 건 전문가들이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파란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를 권하며 관찰하고 기록하고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바다에 갈 거야, 그러는 게 좋았어요. 모든 걸 다 바꿔내고 전 지구적 연대를 통해서 기후위기, 자본주의 박살 낼 거야, 그러면 그냥 마음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후원은 할 거예요.(웃음)
우리는 바다에 간다, 다이빙을 할 거다, 이런 말을 듣는 게 위안이 됐어요. 바다에 들어가서 기록을 하다 보면 직면하게 되니까 괴롭기도 하겠죠. 그래도 바다 들어가는 설렘과 또 아름다움도 같이 본다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게 뭐랄까, 반성폭력 운동에서 법정 동행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잖아요. 엄청 괴롭고 힘든 일일 텐데 사람들이 그걸 하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런 것처럼.
홍시 : 요즘 ’반려 해변‘이란 말이 있잖아요. 반려 동물, 반려 식물처럼. 바다의 해변도 애정을 갖고 돌보고 함께 교감하자는 거요. 제가 생각하기엔 시민과학의 움직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올해 일부라도 회원들과 함께 이런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혹시 파란의 회원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책이나 영화 있나요?
신율 : 김혼비 작가님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추천합니다. 너무 재밌어요. [아무튼 술]을 쓴 분인데, 술과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축구 이야기를 썼다는 게 너무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그리고 [다정소감]이란 책도 추천해요. 다정함에 대한 에세이인데, 그분이 축구동호회를 오랫동안 하나 보니 축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한 번은 축구 연습시간에 30분 일찍 도착했더니 동호회 40-50대 여성들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거예요. 놀라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분들 말이 "우리도 30대 때는 안 됐어. 원래 그때는 안돼. " 그러더래요.
보통은 나이 든 사람들이 더 젊은 사람들에게 "좋겠다. 나도 그땐 그랬어" 하는데 이건 거꾸로인 거예요. 결론은 나이가 아니라 훈련인 거죠. 훈련을 하면 할수록 체력은 는다는 거죠.
홍시 :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꼭 읽어봐야겠네요. 오늘 신율과 이야기 나누면서 ’자기방어훈련‘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덧1. 신율이 제주민우회에서 진행했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2023년 프로그램 후기 엿보기 https://nuly.do/kpR7
🪸덧2. 신율이 추천한 책 첫 번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61494041
🪸덧3. 신율이 추천한 책 두 번째 [다정소감]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4191330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 |
홍시의 말 : 파란 회원 인터뷰를 하며 그동안 바다와 직접 관련된 활동을 하는 회원을 만나 왔습니다. 이번 다섯 번째 주인공은 좀 다릅니다. 다이버도 아니고 해녀도 아닌 이신율 회원은 총회 참석이 파란 회원으로서 첫 활동이고, 총회가 매우 편안하고 좋았다고 합니다. 함덕에 살며 함덕 바다를 사랑하는 이신율(이하 신율) 회원을 만나 봅니다.
홍시 : 반갑습니다. 신율! 바다와 관련한 직접 활동을 하는 회원이 아닌 분으로는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신율 : 제가 처음이라고요.(와와 손뼉 치며 환호)
홍시 : 신율의 바다에 대한 첫 기억은 어떤지 궁금해요. 어떤 기억이 있는지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신율 : 저는 강원도에서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살았어요. 그때 동해 바다를 갔던 게 바다에 대한 첫 기억이에요. 바다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파도와 동해 깊은 바다에 빠질까 봐 무서웠어요. 왜 선택하는 거 있잖아요. 바다냐 숲이냐, 이러면 항상 숲 선택하고 이랬거든요. 그러다가 12년 전에 제주도에 처음 놀러 와서 바다를 봤는데, 바다가 수면 위로 야트막하고 넓게 펼쳐져 있고 사납지 않다고 느꼈어요. 그중에서도 제게는 함덕이 제일 안전하다고 느껴졌지요. 수영도 못하고 많이 무서워하는데 함덕 바다에서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원래 바다에 들어가 놀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수영복도 안 챙겨 왔고 그날 바로 비행기 타고 집으로 올라가야 되는 일정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상태로 그냥, 입은 옷 그대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 버린 거예요. 바다에서 막 놀고는 그냥 근처 식당 화장실에 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게 바다와의 첫 좋은 기억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뒤로 거의 매년 함덕 바다에 왔어요. 그러다가 아예 이사까지 하게 되었죠.
홍시 : 바다의 무엇이 그렇게 신율을 이끌었을까요?
신율 : 사실 바다는 지금도 무섭거든요. 저는 다른 사람들 보다 추위를 훨씬 많이 타요. 색깔도 파란색 하얀색 이런 색을 싫어하고 따뜻한 색만 좋아해요. 그런데 함덕이 갈색이 되게 많아요. 서우봉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그래서 제가 여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광활한 수평선과 가로줄이 주는 안정감, 그리고 따뜻한 색감과 서우봉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제가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홍시 : 지난여름에도 바다에 들어갔나요?
신율 : 매일 밤 갔어요. 바다가 되게 얕으니까 밤에도 안전하게 느껴지고 저기 서우봉 앞에 작은 해변이 있거든요. 거기는 얕아서 매일 밤바다에 들어갔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요즘 유행하는 어싱(earthing), 동네 주민들과 어싱을 하고 밤 수영하고 집에 들어가요.
홍시 : 밤에 바다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이에요?
신율 : 물속에 들어가면 제 귀에만 들리는 그 소리가,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이에요. 그게 좋았어요.
함덕바다에서 반려인 나랑과 반려견 부우와 함께
홍시 : 신율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요? 그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았는지도 소개해 주세요.
신율 : 이거는 인터뷰에 안 들어가겠지만 솔직한 말로 뭐 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함께 웃음) 뭐 하며 사나 생각할 땐 약간 아득해지는데 어쨌든,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은 여성주의와 관련된 일과 활동을 하고 있어요. 스무 살에 여성주의자 언니들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너무 재밌고 좋은 말들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니네트워크라는 커뮤니티에 발을 담그게 된 거죠. 그전엔 여성주의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요. 2006년 무렵 제가 대학교 1학년, 스무 살이었는데 그 당시 많은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 이렇게 시작하는 말을 많이 했어요. 저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페미니즘, 좀 극단적인 사람들이 하는 거 아냐?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언니네트워크가 여는 캠프 기획단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뭔지도 모르고 그냥 친구 따라 간 거예요. 1박 2일 회의였고 장소가 여성플라자였어요.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다 닉네임을 말하더니 다 함께 존댓말을 하던지 아님 반말을 하던지 하자는 거예요. 나이와 상관없이요. 저한텐 이게 엄청난 문화 충격이었어요. 그리고는 캠프에서 꼭 지켰으면 하는 약속들을 정하는데, 어떤 사람은 벌레나 곤충이 나와도 함부로 죽이지 말자는 걸 넣자고 하는 거예요.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걸 약속으로 정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을까. 모기는 죽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이야기도 하고요. 가자마자 이런 얘기를 너무 길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이슈는 지금 생각해도 답이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그런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대학교 1학년이 캠프 하면, 국토대장정 같은 걸 생각했지 이런 섬세한 감수성을 다룰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요. 근데 그게 참 좋았어요. 이 사람들 좋은 사람들이다, 안전한 사람들이다,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지만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뒤로 이 언저리에 계속 놀고먹고 하다 보니까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성평등 교육이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관련해서 기획하고 강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홍시 : 자기방어훈련, 궁금해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어떤 내용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신율 : 자기방어훈련은 제가 20대 초반에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곳에서 반성폭력 문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6개월짜리 프로젝트였는데 매주 기획단이랑 10대 청소녀들이 같이 만나서 몸 훈련을 하는 거예요. 강사는 여성들이었는데 태권도 선생님도 수영 선생님도 계셨어요. 다양한 선생님들 만나서 몸 훈련하고 마지막에는 3박 4일 다 함께 지리산 종주로 마쳤지요. 제가 그때 많이 달라졌거든요. 아버지가 군인이셨고 군인 가족으로 살다 보니 내가 예의를 잘 지키고 있나, 민폐가 되면 안 된다, 과민할 정도로 신경 쓰며 살았어요. 그러다 보면 위축이 되잖아요. 처음엔 자기방어훈련이 강간 위험 시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훈련,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훈련을 다 마치고 나니 달라진 점은 평소에 사람들한테 거절하는 게 어려웠는데, 그게 좀 가능해졌다거나 협상을 하는 게 좀 가능해졌어요. 일상에서의 변화를 제가 직접 느끼게 된 거죠. 일원으로 참여했다가 이건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어요. 같은 대학의 페미니스트 선배 친구와 의기투합해 웹자보 그냥 만들어 여성태권도연맹 선생님 섭외해서 프로그램 기획했지요. 근데 그때는 사람들이 다 심심했던 것 같아요. 스마트폰 이전 시대라서 10주짜리 프로그램에 스무 명이 다 찬 거예요. 지원금 없이 모두 자기 돈 20만 원 내구요. 그때 18주짜리 프로그램도 했어요. 지금이면 못할 것 같아요. 사람들도 이제 다른 재밌는 게 많잖아요.
그게 제가 그냥 제가 살면서 해본 거 중에 제일 재밌었던 것 같아요. 소리 지르고 송판 격파하고 아니면 친구랑 같이 막 훈련하다 한 명 팔 부러지고. 근데 그게 약간 훈장처럼 느껴지고. 그리고 같이 술집 갔는데 여자들한테 뭐라고 하면, 막 싸움닭처럼 싸우고. 그런 경험이 위축되어 있던 제가 활개를 펼친 경험이 된 것 같아요. 그게 제일 재미있었어요. 제가 대학 때 교생 실습했거든요. 사회 교사였는데 어느 특목고 여고에서 실습했어요. 교생 실습 때 같이 자기방어 훈련하고 소리 지르기 훈련하고 그랬어요. 수능 안 보고 곧 실습 나갈 학생들이어서 애들이 너무나 좋아했어요. 같이 욕하기 훈련하고. 욕설도 내뱉어 봐야 필요할 때 딱 나지막하게 할 수 있거든요.(함께 웃음) 욕은 안 하는 게 좋지만 해야 할 땐 할 수 있어야 위험한 상대를 협박할 수 있거든요.
홍시 : 자기방어훈련이 신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네요. 몸도 그렇지만 마음가짐, 그리고 정신세계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자존감도 확 높아지고요.
신율 : 근데 그렇게 자존감이 쉽게 높아지는 건 아니 더라고요.(함께 웃음)
자기방어훈련 시 시범을 보이는 신율
홍시 : 제주도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신율 : 2018년부터 자기방어훈련을 열심히 했더니 여러 곳에서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언니네트워크나 살림의료사협 같은 데서요. 한 3년 재밌게 하려고 했고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에서 프로젝트도 지원받았는데 그만 코로나가 터진 거예요. 그래서 운영을 할 수가 없었어요. 내년에는 괜찮겠지, 또 다음 해엔 괜찮겠지 했는데 계속되더라고요.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계속 살 수는 없다 생각하고 제주 함덕으로 오게 된 거죠. 원래 1년만 살고 다시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그냥 눌러앉게 되었어요. 함덕이 좋았나 봐요.
홍시 : 제주에 와서는 자기방어훈련을 제주여민회랑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의 계획은 어때요?
신율 : 제주여민회에는 2030 위원회가 있는데 거기랑 연결이 되면서 시작하게 되었어요. 홍보물 보고는 여민회랑 관계없는 분들도 많이 오셨어요. 대체로 이주민들이었고 1인 가구 여성들이었어요. 사람들이 늦은 시간 시내에서 버스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은 버스에서 좀 무섭다고 느낀 사람이 있는데 자기방어훈련을 해 보니까 어떻게 대응해야겠다 하는 시뮬레이션이 그려지더래요. 아무 일 일어나진 않았지만 위축된 상태로 20분을 가던 이전과는 달리 이렇게 해봐야지, 저렇게 해봐야지 생각하며 가는 20분은 다르잖아요. 자기효능감이 있는 20분이잖아요. 참가자들에게 그런 피드백을 들었던 게 제일 좋았어요.
홍시 : 그랬을 것 같아요. 여민회 자기방어훈련 홍보물 봤을 때 너무 하고 싶었는데 2030 세대만 대상이겠거니 하고 전 신청 안 했지요. 혹시 올해 5060을 위해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장소 찾고 사람 모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누구나 자기방어훈련 필요할 거 같은데.
신율 : 맞아요. 누구나 필요하죠. 사람만 모아지면 할 수 있고요.
홍시 : 파란 회원은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어요?
신율 : 솔직히 말하면 홍시 때문이요.(함께 웃음) 세상에 후원할 곳은 너무 많잖아요. 하고 싶은 곳이야 50군데도 넘죠. 근데 주변에 활동가가 있으면 하는 것 같아요. 진짜 가입은 홍시가 하니까 했어요. 가입하고 나서 좋았던 점은 있죠. 바다 관련 이슈에 대응하는 활동 이렇게만 알았는데 파란에서 시민들의 참여, 이걸 계속 강조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여성운동도 퀴어 운동도 다 모두의 참여를 독려하는 거죠. 기후변화 이런 거 너무나 큰 이슈이고 관찰, 데이터 측정 같은 건 전문가들이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파란에서는 시민들의 참여를 권하며 관찰하고 기록하고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바다에 갈 거야, 그러는 게 좋았어요. 모든 걸 다 바꿔내고 전 지구적 연대를 통해서 기후위기, 자본주의 박살 낼 거야, 그러면 그냥 마음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후원은 할 거예요.(웃음)
우리는 바다에 간다, 다이빙을 할 거다, 이런 말을 듣는 게 위안이 됐어요. 바다에 들어가서 기록을 하다 보면 직면하게 되니까 괴롭기도 하겠죠. 그래도 바다 들어가는 설렘과 또 아름다움도 같이 본다는 것이 느껴져서 좋았던 것 같아요. 그게 뭐랄까, 반성폭력 운동에서 법정 동행하고 기록하는 일을 하잖아요. 엄청 괴롭고 힘든 일일 텐데 사람들이 그걸 하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런 것처럼.
홍시 : 요즘 ’반려 해변‘이란 말이 있잖아요. 반려 동물, 반려 식물처럼. 바다의 해변도 애정을 갖고 돌보고 함께 교감하자는 거요. 제가 생각하기엔 시민과학의 움직임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올해 일부라도 회원들과 함께 이런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혹시 파란의 회원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책이나 영화 있나요?
신율 : 김혼비 작가님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추천합니다. 너무 재밌어요. [아무튼 술]을 쓴 분인데, 술과 거리가 있을 것 같은 축구 이야기를 썼다는 게 너무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그리고 [다정소감]이란 책도 추천해요. 다정함에 대한 에세이인데, 그분이 축구동호회를 오랫동안 하나 보니 축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한 번은 축구 연습시간에 30분 일찍 도착했더니 동호회 40-50대 여성들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거예요. 놀라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분들 말이 "우리도 30대 때는 안 됐어. 원래 그때는 안돼. " 그러더래요.
보통은 나이 든 사람들이 더 젊은 사람들에게 "좋겠다. 나도 그땐 그랬어" 하는데 이건 거꾸로인 거예요. 결론은 나이가 아니라 훈련인 거죠. 훈련을 하면 할수록 체력은 는다는 거죠.
홍시 :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꼭 읽어봐야겠네요. 오늘 신율과 이야기 나누면서 ’자기방어훈련‘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덧1. 신율이 제주민우회에서 진행했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2023년 프로그램 후기 엿보기 https://nuly.do/kpR7
🪸덧2. 신율이 추천한 책 첫 번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61494041
🪸덧3. 신율이 추천한 책 두 번째 [다정소감]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4191330
인터뷰어 : 홍시 (김연순)
젠더, 생태, 평화,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해 왔으며
제주로 이주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데 시간을 보내는 삶을 만끽하는 중.
-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 현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의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