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tter]어느 식솔들의 삶과 ‘듬북’ | 고광민(서민생활사 연구자)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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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식솔들의 삶과 ‘듬북’


고광민(서민생활사 연구자)

 

제주도 생명체들의 ‘듬북’과의 인연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화산섬에는 논이 귀하여 모든 경지면적 중에서 0.5%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한반도의 논은 모든 경지면적 중에서 58%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한반도가 논농사 지대라면 제주도는 밭농사 지대였다. 제주도 사람들이 밭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제주도 사람들이 처한 화산섬이라는 조건 때문이었다. 제주도에는 제주도 이외의 육지부보다 비는 많이 내리지만,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제주도 땅 위에는 논이 귀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주로 밭에서 겨울 농사로 보리, 여름 농사로 조를 생산하였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 사람들의 시각은, 보리와 조는 잡곡(雜穀)이었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게 보리와 조는 주곡(主穀)이었다. 보리농사를 짓는 데는 거름이 강조되었다. 보리밭에 거름을 주지 않으면 보리 낟알은 달리지 않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보리 생산을 위하여 거름 확보에 몰두하였다. 제주도에서 전승되었던 보리밭 거름은 크게 ‘쉐걸름’, ‘돗걸름’, ‘듬북’이었다.

쉐걸름은 외양간에서 풀이나 지푸라기들과 소의 배설물을 함께 걷어내 발효시킨 거름이었다. 돗걸름은 돼지우리에서 돼지 똥오줌과 빗물에다, 보릿짚이나 잡풀, 그리고 사람의 똥오줌 등이 함께 오랫동안 절이고 삭혀서 만들어진 거름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돗걸름과 쉐걸름 생산에 몰두하였던 역사는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소와 돼지 키우기 좋아하였다”(好養牛及猪)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쉐걸름과 돗걸름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와 돼지를 길렀다. 쉐걸름과 돗걸름만으로 보리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니, 반드시 듬북이 요구되었다. 듬북은 보리밭에 거름으로 주는 해조류라는 말이다. 듬북은 화산섬 제주 바다가 준 선물이었다.

화산섬 제주 바다는 ‘걸바당’이다. 걸바당은 조간대를 벗어나 바닷속 바닥이 돌이나 암반으로 이루어진 바다이다. 걸바당의 갯바위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제주 바닷속 듬북을 비롯한 미역, 식용 모자반, 우뭇가사리, 청각 등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갯바위에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고 힘차게 자랐다. 제주 바닷속 듬북들은 제주 바다에서 살아가는 전복, 소라, 고둥들의 식량이었고, 제주 땅 위에서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이 보리를 갈 때는 거름이 되어주었다. 제주 바닷속의 해조류들은 제주 바다에 사는 여러 패류(貝類)와 제주도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난전’에는 ‘쉐걸름’과 ‘돗걸름’, ‘안가름’에는 ‘듬북’

성산읍 오조리 채○○(1928년생, 남) 씨 부부는 자식 셋을 두었다. 채씨 집안 식솔들이 식량을 생산하는 밭은 ‘난전’과 ‘안가름’ 지경에 나누어져 있었다. 난전은 마을에서 떨어져 나간 들녘에 있는 밭이다. 난전은 오조리 마을에서 서쪽 일주도로 주변에 있다. 그리고 안가름은 오조리 515번지에 있는 밭과 그 주변 농경지 이름이다. 오조리 난전 지경에 있는 밭들은 척박토(瘠薄土), 오조리 안가름 지경에 있는 밭들은 비옥토(肥沃土)였다. 채씨 집안 식솔들이 먹을 식량을 생산하는 밭은 난전에 있는 ‘코거리’에 500평, ‘접안이머들’에 350평, 그리고 ‘돔베망케’에 550평짜리 밭이었다. 척박토 난전에 있는 1,400평 밭에서는 성인 두 식솔이 먹을 식량을 겨우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채씨 식솔들은 쉐걸름과 돗걸름으로 난전의 보리농사를 지었다. 채씨 식솔들은 늘 암소 한 마리를 가꾸었다. 쉐막(외양간)에서 생산되는 쉐걸름으로 250평에 밑거름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돼지우리에서 생산되는 돗걸름으로는 150평에 밑거름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채씨 식솔들은 난전에서만 농사를 지어서는 굶주림을 이겨낼 수 없었으니, 안가름 지경 부잣집 밭을 빌어 소작하여 식량을 보태야 했다. 오조리 안가름 지경에 있는 밭은 보리농사 때 듬북을 거름으로 주는 조건으로 빌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듬북을 밭에 잘 주기만 하면, 안가름 지경 밭에서 보리농사로 얻은 보리는 온통 채씨 식솔들이 차지할 수 있었다. 듬북 거름이 소작료였던 것이다. 듬북 거름으로 보리농사를 짓고 나면 여름 농사로 조가 잘 되었기 때문에, 안가름 지경에 밭을 소유하고 있는 임자들은 듬북 거름을 조건으로 밭을 빌려주곤 했다.

채씨가 30대 무렵에는 안가름 지경에 있는 ‘객주리ᄃᆞᆯ레’ 550평짜리 밭을 빌어 보리농사를 지었다. 물론 겨울 농사로 보리 갈 때 듬북 거름을 주는 조건이었다. 채씨가 40대 무렵에는 아이들은 쑥 자랐다. 이제 다섯 식솔로 늘어났으니, 안가름 지경 ‘중그무ᄃᆞᆯ레’ 1,300평 정도의 밭을 빌어 농사짓기에 나섰다. 식솔이 늘어난 만큼 듬북 거름 확보 수량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바다의 선물 ‘듬북’

듬북은 바다 조간대와 점심대에 붙어 자랐다. 오조리에서 듬북 채취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전승되었다. 오조리 사람들은 듬북을 ‘ᄀᆞᆺ듬북’, ‘실갱이’라는 잔가시모자반, ‘고지기’라는 큰잎모자반으로 구분하였는데, 세 가지 듬북은 채취 방법이 서로 달랐다.

‘ᄀᆞᆺ듬북’은 조간대와 조간대 가까운 점심대(漸深帶)에서 자라는 거름 해조류라는 말이다. ᄀᆞᆺ듬북은 6개 동네별로 나누어 ‘허채’(許採)하였다. 허채는 ‘채취를 허락하다’의 뜻으로 해산물 따위를 정해진 기간 동안 채취를 금지했다가 허락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ᄀᆞᆺ듬북 채취 시기는 음력 3월 하순부터 음력 4월 사이에 이루어졌다. 동네마다 ᄀᆞᆺ듬북 채취 책임자를 ‘패장’이라고 하였다. 패장은 ᄀᆞᆺ듬북을 채취하는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동네 사람들은 ᄀᆞᆺ듬북을 공동으로 채취하고 서로 나누었다. 이때도 패장은 수고의 값으로 한 몫을 더 차지하였다.

잔가시모자반은 음력 4월에 자유롭고 꾸준하게 채취하였다. 잔가시모자반 어장은 ‘한여웃통’이었다. 잔가시모자반을 채취하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채씨도 잔가시모자반 채취에 참여하였다. 모두 4명이 하나의 테우 위에서 ‘줄아시’로 잔가시모자반을 베어냈다. ‘줄아시’는 잔가시모자반을 베는 기다란 낫이다. 이때의 테우를 ‘줄아싯배’라고 하였다. ‘줄아싯배’에서는 2명이 서로 교대하면서 조류를 거스르며 노를 저었고, 나머지 2명은 ‘줄아시’로 잔가시모자반을 베어냈다. 노를 젓는 일과 잔가시모자반을 베어내는 일도 서로 번갈아 했다. 베어낸 잔가시모자반은 물 위에 떴다. 다른 테우 3척에는 각각 두 사람씩 나누어 탔다. 이들은 물 위에 뜬 잔가시모자반을 테우 위에 싣고 갯가로 운반하였다. 이때의 테우를 ‘공쟁잇배’라고 하였다. ‘공쟁잇배’에 탄 한 사람은 노를 저었고, 한 사람은 ‘공쟁이’로 잔가시모자반을 건져 올렸다. ‘공쟁이’는 기다란 대막대기에 꼬부라진 나뭇조각을 묶어 만든 어구다. 이렇게 채취한 잔가시모자반은 서로 나누었다.

큰잎모자반은 음력 6월에 자유롭게 꾸준하게 채취하였다. 큰잎모자반은 물속 ‘여’에 붙어 자랐다. 여는 바닷물 속에 잠겨 있거나 썰물 때 드러나는 바위를 말한다. 보통 풍선 한 척에 남자 사공 한 사람과 해녀 두 사람이 타고 바다로 나가 공동으로 큰잎모자반을 채취하였다. 풍선은 사공 채씨의 소유였고, 채씨 부인도 해녀로 참여하였다. 큰잎모자반이 많이 자라는 바다에 닻을 놓고 풍선을 세웠다. 해녀는 ‘ᄌᆞᆼ게호미’라는 낫을 들고 물속으로 들어가 큰잎모자반을 베고 물 위로 올라왔다. ‘ᄌᆞᆼ게호미’는 슴베를 자루 바깥 한쪽에 박아 철사 따위로 단단하게 묶어 만든 낫이다. 자루 바깥 한쪽에 박고 철사 따위로 단단하게 묶어야 바닷물 속에서도 쉬 빠지지 않는다. 사공은 풍선 위에서 해녀가 따낸 큰잎모자반을 ‘공쟁이’에 걸어 풍선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고지기를 뭍으로 운반하여 널어 말렸다. 테우 몫, 사공 몫, 해녀 몫으로 각각 한 몫씩 나누었다.

오조리 채씨 부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듬북’을 채취하여야 1년에 500~1,000평 정도 보리밭에 줄 밑거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 제주 화산섬 바다에는 듬북을 비롯한 해조류들이 사라지고 있다. 제주 바다에 사는 전복, 소라, 고둥들의 식량이 사라지고 말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전복이 이동하는 모습을 두고 ‘날아다닌다’고 한다. 날아다니는 전복은 듬북이 많은 바다로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소라, 고둥, 그리고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 제주도에서 살아가야 한다. 제주도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 난리(亂離)를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제주도의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곳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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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번난지’ 줍다


1997년 6월 21일, 구좌읍 한동리 동네 사람들이 공동소유의 바다에 파도를 타고 밀려든 ‘번난지’를 줍고 있다. ‘번난지’는 파도를 타고 바닷가로 떠밀려 온 거름 해조류 이외의 미역, 우뭇가사리, 청각 등의 해조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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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고지기무레(사진 현용준)


‘고지기무레’는 해녀들이 큰잎모자반을 채취하는 일을 말한다. 1977년 8월 어느 날, 조천읍 북촌리에서 ‘테우’ 한 척에 해녀 1~2명과 남자 사공 1명이 함께 하였다. 해녀는 ‘게호미’를 잡고 잠수하여 ‘고지기’(큰잎모자반)를 베어냈고, 뱃사공은 ‘공쟁이’라는 갈퀴로 걸어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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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듬북눌’(사진 홍정표)

‘듬북눌’은 거름으로 쓸 거름 해조류 따위를 말려 노적가리 모양으로 쌓아놓은 것이다. 봄과 여름에 채취한 ‘듬북’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입동(11월 8일경) 무렵에 보리 갈 때 밑거름으로 주었다.



- 본 내용은 해양시민과학센터 파란 발간물 <제주 해조류와 생활사>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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